편집국장 공인배

안철수에 따라붙는 수식은 많다. 그러나 그가 최근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기득권의 판(板)에 충돌하면서 일으킨 '융합'의 쓰나미에 덮히지 않을 것은 없는 듯 하다. 이 정치판에서 그가 특정 대학교의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라는 사실이 무관하지 않은 것 같은 착각이 드는 이유다.

그가 일으킨 지진은 양대 정치판과 판 사이에 끼어 보이지 않았던 박원순을 우뚝 밀어올렸다. 박원순은 제1야당 민주당이 낸 서울시장 후보를 물리치고 범야권 단일후보로 등극하면서 안철수발 지각변동의 규모를 확인시켜줬다. 이는 ‘안철수 역량의 결과인가 시대정신인가’ 라는 질문 앞에 발길을 멈추게하는 대목이다.

나아가 시민정치와 정당정치의 유기적 융합의 발화점이 될 것인지, 단순히 오세훈과 한나라당의 시민들은 안중에도 없는 독선에 진절머리가 난 서울시민들의 일시적인 반발인지, 그 답을 내기에는 당장 판단 지표가 부족하다. 이럴땐 시간이 유일한 현자(賢者)다. 하지만 융합이 서있는 지점에 대한 논의는 결코 유보할 수 없다.

이 시대, 기성정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신과 냉소는 그 속성이 게을러서 세를 더하는데는 더디다. 그러나 더이상 수면 아래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지 않는 중도적 반응 수준은 견지한다. 다소 소극적이지만 적절한 촉매만 있으면 단시간에 결속하는 형질이다. 그 질량을 측정할 수는 없지만 정치의 한계상황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그런 점에서 수면 아래나 위의 유권자는 소통할 수 없는 관계가 아니다. 다만, 자신의 임계점에 둔감할 따름이다. 액체와 기체가 본래 분리되어 있으나 서로 성상이 다르지 않은 것 처럼 유권자들의 의식은 수면에서 작용한다. 의도적인 방향성은 없지만, 처한 온도와 압력 같은 환경에 저절로 반응하는 수용체를 지닌다.

유권자의 일체화는 어느 순간 감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지는 생존 체제다. 불완전한 것을 극복하기 위한 모색이다. 이 때 새판을 거부하는 정치권은 스스로 파멸을 부를 것이다. 우리는 3.1운동이나 4.19, 6·10같은 국민적 일체화를 경험한 바 있다.

그러나 인위적인 융합의 조장은 부족한 땔감을 한꺼번에 모아 불을 지르는 것과 같다. 열원(熱源)이 고갈되면 온도와 압력은 하강하고 분열상태가 고착화 된다. 유권자들은 단기적인 성취감에 안주하고 나태해지며 부조리에 무디어진다. 안철수의 깜짝쇼는 그 이상일까.

지배정당들의 신물나는 행태에 울화가 치밀고 대안에 목말랐던 민감한 시기였다. 서울시민들에게 안철수는 한 모금 청량음료였다. 그러나 갈증은 해소되지 않은 탓에 그 내용과는 무관하지만 상쾌했던 맛이 뇌리에 각인된 상태다. 박원순은 그런 서울시민들 기대의 연장선상에 서있다. 그는 변화와 통합의 이름을 등록했을까.

박원순은 이미 융합에 실패하고 있다. 시민 선거혁명을 외치며 자신에게 공정한 경선 기회를 준 민주당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그가 민주당에 입당하는 것 만이 민주당이 써온 역사 위에 새로운 미래를 써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의욕넘치는 독자적 구도가 융합의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손학규 대표가 서울시장 범야권 후보 경선 직후 돌연 민주당 대표직 사임의사를 표명한 것은 박원순의 광채가 지나쳐 민주당이 그 그늘 속에 떨어진 양상이 됐기 때문이다. 손 대표의 사의는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었다. 박원순의 흥행 가도에 찬물을 끼얹은 무책임한 행태였다. 곧바로 사의를 철회했지만 범야권 후보 단일화의 진정성은 크게 훼손됐다.

화광동진(和光同塵)하지 못한 박원순 역시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를 부추기는 진보진영도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박원순이 자신의 고유한 경쟁력으로 경선에서 승리했다고 자만한다면, 뭔가 다른 정치를 보여주겠다는 과잉 의욕에 사로잡힌다면, 그것은 융합이라는 시대정신과 동떨어진다. 그가 확보한 경쟁력도 상실하고 말 것이다. 설령 그가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한들 서울시장을 바꾼 것 이외에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본선에서 낙선해도 나만의 빛깔로 찬란히 빛났으면 그만이라는 식의 생각 역시 버려야 한다. 정치란 당선자에게 메가폰을 부여하는 속성을 지닌다. 다른 한편으로 얼굴을 내밀어 인지도를 쌓는데 의미를 두는 것도 박원순에게는 맞지 않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 이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릴 민심에 안철수의 바람이 여전히 통할 수 있을까.

민심이란 가능성이 높은 쪽으로 기우는 안전추다. 특히 경쟁에 찌들고 상처 투성이인 서민들은 패배를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지금은 참신한 안철수의 바람이 박원순의 패배 이후에도 지속되리라는 기대는 애당초 무리다. 시대정신 읽기는 박원순에게 먼저 요구되며, 시대정신에 부응하기는 민주당과 범야권의 당면 과제다.

희망을 밟아 뭉게는 지역시민활동가

시선을 거두어 10.26 도의원 보선을 앞둔 익산으로 돌려도 다른 현상을 볼 수는 없다. 익산시민사회는 상당한 세월을 민주당 일색의 정치에 노출되었다. 시민을 경시하는 패권주의의 폐해를 지극히 잘 알게 되었다.    

난 7월 민주당 익산을지역위의 공천으로 당선된 도의원이 남은 임기 3년을 팽개치고 조합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시민사회의 불만은 폭발했다. 전례 없는 성토와 개선요구가 지속됐고, 급기야 10.26보궐선거에 반민주당연합 단일후보를 내자는 논의에 불을 붙였다. 이대로 지역정치판이 바뀌는가했다.

그러나 시민사회단체의 한 활동가가 돌연 출마를 선언하고 나오는 바람에 시민사회단체가 주도하던 후보 단일화의 동력은 상실되고 말았다. 시민사회단체가 중재역을 포기한 마당에 이 시민 활동가는 후보 단일화와는 무관한 독자출마의 뜻을 시사한 뒤 일방통행 중이다. 이는, 그동안 시민사회단체가 보여준 민주당 비판 1인시위 릴레이와 잇따른 성명 발표 등의 순수성을 크게 훼손했다.

이 활동가는 자신이 속했던 시민사회를 공황상태에 빠뜨리고, 지역정치판에 촉발됐던 희망의 불씨를 밟아 뭉게버렸다.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이 시대는 과학 뿐만 아니라 시장(市場)에서 조차 '융합'을 화두로 삼고 있다. 개인의 빛깔이 아무리 화려한들 공감을 얻지 못하면 무슨 소용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