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산성 전투 이후.. 귀족 실권 장악 및 왕권약화
왕권강화 위한 전략적 요충지.. 익산지역 급부상

◇ 왕권약화의 서막

백제사에 있어서 관산성 전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전투의 패배로 내우외환을 심화시켜 안으로 왕권강화를 어렵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왕실의 존엄까지도 흔들리게 됐고, 밖으로는 끊임없이 도전해오는 외부세력, 특히 신라와의 관계를 복잡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내우외환 속에서 왕위를 이어 즉위한 왕이 바로 위덕왕(554~598)이다. 그는 왕권을 강화시켜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되찾고 외적을 막아 국가를 일으켜 세워야 하는 막중한 부담을 안고 있었다.
관산성 전투 전부터 대 신라정책에 있어서 강경파였던 그는 전쟁이 패하자 온건파의 집중 견제를 받았고, 온건 세력들이 자연스럽게 정치의 실권을 잡으면서 지배 세력이 재편됐다. 이 과정에서 실권을 잡은 대성팔족은 한성도읍기 이래 여러 가문 귀족으로 이뤄졌지만, 당시의 세력순위는 사 씨, 연 씨, 백 씨 등 웅진도읍기 이후 등장한 세력들이 우세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왕권에 반대하는 귀족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해 왕을 구심점으로 정치를 하기 위해 위덕왕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전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위덕왕은 8년(561)에 신라를 공격했으나 1천여명을 잃고 패했고, 신라 진흥왕이 죽고 진지왕이 즉위하자 24년(577)에 다시 신라를 공격했다. 하지만 결과는 3천7백여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고 오히려 신라의 보복으로 이듬해(578)에 알야산성(지금의 낭산면)이 함락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안으로부터 좌평을 위시한 귀족들의 책임 추궁이 거세져 왕권의 위기를 느낀 위덕왕은 적국이었던 신라에 굴욕을 무릅쓰고 왕실간의 혼인을 청하게 된다.

◇ 효순의 등장

문헌적인 계보 상에서 위덕왕 다음에 왕위를 계승하는 혜왕은 그의 동생이다. 혜왕의 아들은 법왕이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법왕의 아들이 무왕이 된다. 위덕왕이 죽고 598년 12월에 70세 고령의 혜왕이 즉위했으나 그 이듬해에 그도 세상을 떠나고, 뒤를 이어 즉위한 법왕 또한 즉위한 다음해인 600년에 사망하게 된다.

위덕왕 말년인 598년,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에도 불구하고 교통로를 따라 기습전을 시도한 고구려군의 백제 침공으로 백제 조정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당시 백제는 고령의 위덕왕의 통치력이 쇠퇴하고 태자인 아좌는 일본에 건너가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전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갈 실체가 뚜렷하게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제는 고구려군의 침공을 격퇴했다. 당시 이 전쟁은 위덕왕의 조카이며 혜왕의 아들인 효순(법왕)에 의해 주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효순은 고구려가 침공하고 1년 뒤인 599년에 전승원혼을 위해 오합사를 창건했다. 오합사는 백제왕실의 각별한 배려 하에 창건된 호국원찰이었다. 이러한 호국원찰이 효순의 주도 하에 창건됐다는 것은 이후 효순이 법왕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가 있다.

또한 전쟁이 끝나고 3개월 후에 위덕왕의 아우인 혜왕이 70세가 넘는 고령의 나이로 위덕왕의 아들인 아좌태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즉위하게 된다. 이는 고구려의 침공을 주도적으로 격퇴한 효순이 정치적 실권을 쥐고서, 고령의 나이지만 일단 그의 부친을 즉위시켰던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 사비시기 익산의 위상

당시에 서동이 익산에 살고 있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정치적 실권을 쥐게 된 효순은 사비천도 이후 중앙과 지방의 제도를 정비하고 지방의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종래의 담로제를 방·군·성제로 개편했는데, 군의 군사적인 부분은 방의 치소인 방성의 관할 아래 있었지만 행정적인 면에서는 중앙과 직접적인 명령관계에 있었다. 또한 조직의 개편만으로는 중앙의 실권 귀족들을 통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전쟁에 패할 때마다 귀족들은 압박을 가하는 존재로 상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왕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확보하고 있는 지방의 유력한 세력들과의 유대관계를 특별히 유지하고자 했고, 익산지역은 이러한 조건에 안성맞춤인 지역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익산지역은 구 마한세력을 회유해 왕권을 신장시키거나, 호남지역의 확실한 지배를 통한 경제력의 확보, 계속적으로 침략을 해오는 신라에 대한 확실한 견제를 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 그리고 중국과 일본을 방문하기 위한 관문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익산 입점리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제 관장식과 관모, 금동장식 신발 등이 고분의 주인이 좌평 등의 관등을 소지한 지역 실권세력이었던 점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한다. 고분의 구조 또한 입점리의 고분은 횡혈식 석실분으로 공주 송산리고분, 웅진동고분과 같은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관산성 전투에서 패한 위덕왕은 유력한 지방 세력과 손을 잡음으로써 중앙의 귀족들을 견제하고 왕권강화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고, 이후 젊고 영특한 조카 효순에게 익산지방의 통치를 맡겼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익산지역에 내려온 효순은 토착 세력들과의 융합을 꾀하면서 튼튼한 지지 세력을 얻고 기반을 닦아 나갔으리라. 효순은 때가 이르면 왕을 괴롭히는 중앙의 귀족 세력들의 뿌리가 깊은 사비로부터 익산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을 염두에 두고 나름대로의 계획들을 실천에 옮겨나갔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익사지역에서 생활한 효순은 중앙 귀족들에게 노출되지 않았다. 이후 그가 나설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은 598년 고구려가 침입해 왔을 때다. 당시 위덕왕은 74세의 고령이었고, 아좌태자는 일본에 가 있었다. 효순은 자신이 이끌고 간 군대와 중앙군을 지휘해 당당히 침략군을 격퇴시켰다. 그는 3개월 후 위덕왕이 사망하자, 재빠르게 기회를 포착해 우선 70세의 고령인 자신의 부친을 즉위토록 했다. 하지만 부친 혜왕이 재위 1년도 채 되지 않아 사망하자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러한 점에서 법왕이 된 효순의 등장과 즉위는 극적인 요소가 있는 듯하지만, 사실 그는 준비된 왕이었던 것이다.

그 준비과정이 익산지역에서 오랜 기간 이어져 왔다는 점에서 법왕의 아들인 무왕, 즉 서동이 익산지역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간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법왕의 아들인 무왕은 풍채가 영특하고 체격이 컸으며 지기가 호방하고 기상이 걸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준비된 아버지 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무왕 또한 또 하나의 준비된 왕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송승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