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화산성에 태조의 군대 주둔 기록, 산 밑에 견훤의 마산진터 있어
역사적 가치 높은 성벽 유적들 접근조차 어려워.. 지금도 무너지는 중

익산시 고지도. 가운데 금마를중심으로 북쪽과 동쪽에 산이 둘러져 있어 방어에 유리하다.

익산에서 가장 높은 산은 여산면과 완주군 비봉면의 경계에 있는 해발 500m의 천호산(天壺山)이다.

그 지맥에 미륵산과 용화산이 뻗어있으며 남측과 서측은 주로 야트막한 구릉이나 평야지대로 이뤄져 있다.

또 금강과 만경강이 둘러싸고 있고 한반도의 동서를 잇는 길목인 익산은 고대부터 교통의 요지로 발달해 국가경영에 있어 안성맞춤이었다.

이런 지리적 여건은 익산이라는 곳에서 찬란한 고대 문화가 싹틀 수 있었던 기초가 됐다.

청동기문화를 비롯해 삼국시대 백제문화가 꽃피웠으며 특히 현재 우리나라에 후기 백제의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 바로 익산이다.

고대 문화도시 익산은 소국(小國)이 난립했던 원삼국시대에나 백제, 고구려, 신라로 대표되는 삼국이 한반도의 패권을 다투는 격전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무엇보다 도성을 비롯한 도읍 조성에 외침에 대한 방어가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익산 왕궁리유적을 중심으로 백제시대의 성곽이 특히 많이 분포돼있는 것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익산에는 왕궁성을 포함해 백제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성곽만 10여 곳이며 조선시대에 세워진 읍성(邑城)까지 포함하면 14개 이상 에 이른다.

전국 어디에서도 한 지역에 이렇게 많은 성곽이 밀집해 있고, 더구나 삼국시대의 성곽이 남아 있는 곳은 찾기 어렵다.

익산이라는 지역이 품고 있는 역사의 향기가 특별한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미륵산 기슭에서 만나는 미륵산성. 용화산성이라고도 불린다. 유일하게 복원된 성벽으로, 둘레길을 따라가다 보면 만날 수 있다.

◇ 최후의 결전장

익산시 금마면 용화리에 위치한 용화산(龍華山)은 군입산(軍入山)이라는 별칭이 있다. 말 그대로 군대가 들어온 산이라는 뜻인데 ‘동국여지승람’에 이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동국여지승람’ 여산군 산천(山川)조에 ‘군의 남쪽 12리에 군입산(軍入山)이 있는데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할 때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킨 연유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고 기록돼 있다.

기록대로 여산관아에서 남쪽 12리를 헤아려 보면 천호산과 용화산을 잇는 줄기인 탄현(숯고개)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금마에서 여산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탄현’은 다시 ‘고려사(高麗史)’의 후백제군 정벌기에서 확인된다.

“우리 군대는 황산군에 이르러 탄령을 넘어 마성(馬城)에 주둔했는데, 신검과 그 동생, 그리고 문무 관졸들이 모두 항복했다”

기사에서 보이는 ‘황산군의 탄령’이라는 곳이 탄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태조 왕건의 군대가 주둔했다고 하는 마성은 용화산의 석성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석성 아래에 견훤이 주둔했던 마산진터가 남아 있어 이곳이 후백제 견훤과 태조 왕건의 최후의 결전장으로 비정되고 있다.

용화산에는 옥녀봉, 노승봉, 선인봉, 성태봉 등의 봉우리가 있는데 이들 중 선인봉과 성태봉에 성곽이 남아있다. 성태봉은 해발 342m로 용화산의 주봉(主峰)이며 봉우리를 둘러쌓은 성(둘레 435m)과 북쪽의 보조 성(둘레 175m)으로 이뤄져 있다.

선인봉산성은 해발 252m의 선인봉을 둘러쌓은 석성으로 둘레는 213m-329m로 추정되며 정상부의 평평한 곳에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어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성내에서는 백제시대의 토기조각부터 고려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돼 백제시대에 축조되어 사용되다 고려시대 이후로는 버려진 것으로 판단된다.

용화산 성태봉 산성.

◇ 전략적 요지 천호산성

천호산성은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에 있는 천호산의 500m 주봉을 둘러쌓은 석축산성으로 그 둘레가 670m에 이른다.

산의 이름을 따라 천호산성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속칭에는 태성(台城), 또는 농성(農城)이라고 칭한다.

천호산은 호산(壺山)이라고 불리던 여산고을의 진산(鎭山)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 천호산이라 기록된 것으로 나타나며 여산은 백제의 지양초(只良肖)를 신라가 여산으로 바꾼 이름이다.
천호산성은 주봉에서 북동쪽 봉우리와 남쪽 봉우리를 에워싼 천연 석축 산성으로 이 역시 후백제와 고려군의 격전장이었다고 전해진다.

성벽은 다듬어진 돌로 정교하게 쌓아졌으나 현재는 북쪽 성벽 4m가량만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고 대부분 무너진 상태다.

정상부에서의 전망이 매우 좋아서 멀리 부여와 대전 남쪽의 면병산이 보이고 동남쪽으로는 무주 방면이 가리는 것 없이 시야에 들어와 전략적 요지로서 손색이 없다.

성내에서는 백제시대의 막새기와와 통일신라 시기 이래의 유물들이 보이고 있으며 특히 이 일대에서 고려와 후백제가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과 전설이 있어 후삼국 전란기까지는 중요한 산성으로 기능한 것으로 보인다.

천호산성의 모습. 심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어 관리가 시급하다.

◇ 당치산성(唐峙山城)

여산면 여산리와 태성리에 걸쳐 있는 당치산성은 면소재지에서 북동 방면으로 1.5km~2km되는 지점에 있는 당제산(唐祭山), 혹은 당산(當山), 속칭 장태산이라고 불리는 해발 185m의 산위에 있다. 이 산은 천호산과 용화산이 중간에 위치해 있어서 북쪽에서 오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터진 곳을 방어하는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당치산성은 돌과 흙을 혼용해 쌓은 성으로 석축 부분이 많이 허물어졌으나 옛터는 완연히 남아 있다. 비교적 경사가 급한 곳의 성벽은 상당히 붕괴됐으나 남아있는 벽면의 상태로 보아 높이가 4m 이상으로 보인다.

성안에서는 백제와 통일신라시기 유물과 그 이후의 유물이 보여 옛 고을터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이 산성은 고려시대에 관청으로 사용하려다 그만 둔 바 있고 여산에 도호부(都護府)가 설치됐을 때 사형집행을 이곳에서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 학현산성(鶴峴山城)

학현산성이 있는 학현산 원경.

학현산(일명 성묘산)은 왕궁면 동룡리 산 79번지 일대로 보석박물관 뒤에 있는 낮은 산이다. 이산의 주봉(해발 214m)에 테뫼식 산성인 학현산성이 있는데 2002년 익산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됐다.

천호산을 기준으로 보면 서남쪽 봉동방향의 줄기인 학현산의 봉우리를 둘러싼 학현산성은 둘레 700-760m에 이르는 석성으로, 붕괴된 곳이 많으나 비교적 북쪽 성벽이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성내에는 백제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토기 조각이 수습되고 있기 때문에 백제시대에 축조되었다고 여겨지고 있으며 통일신라 이후 조선시대의 유물도 있어서 일부 민가가 삶의 터전으로 삼기도 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삼국시기에 이곳은 고산, 여산, 은진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 즉 금마를 중심으로 본다면 동쪽 방어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성의 서편에 약 100평 규모의 대지가 있어 건물지로 추정하나 흔적은 없고 다만 토기와 기와편들이 산재해 있다.

◇ 낭산산성(朗山山城)

낭산산성.

낭산산성은 낭산면 상랑마을 뒷산인 낭산의 봉우리를 둘러쌓은 산성으로, 속칭 마한성 또는 귀성(龜城), 북성(北城)이라고도 불린다. 옛 문헌에 마한성이 낭산 위에 석축이 1천3백육척이며 높이가 구척인 산성이 있다고 전하며 마한성이라는 이름은 기준왕이 세웠기 때문이라는 전설도 전해진다.
둘레가 약 870m인 낭산산성은 산의 모양을 따라 둥글게 돌아가며 문터와 물이 빠지는 수구의 흔적이 남아있다.

성의 동남쪽 성벽은 비교적 양호한 모양으로 남아있으며 특히 이곳에는 평탄한 대지가 있고 여기에 건물의 초석으로 보이는 주춧돌이 산재해 있으나 정확한 규모는 파악되지 않았다.

낭산 주민들 얘기로는 성 내부에서 화살촉을 비롯해 석기류가 발견된 바가 있다고 하며 성 내외에서 다른 백제 산성에서 보이는 토기조각과 기와, 고려시대의 기와가 발견돼 백제시대에 축조돼 고려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전라북도 기념물 제 13호로 지정돼 있다.

◇ 성곽에 둘러싸인 익산

지난 호에 이어 익산지역의 성곽들이 품고 있는 전설과 그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익산이 고향이면서도 사실 이렇게 많은 백제시대의 성곽이 주변에 있음을 모르고 지내는 시민들이 많을 것이다.

앞서 소개한 성곽 외에도 용안읍성과 용산성이 읍성의 흔적을 남기고 있으며 함라산성, 어래산성이 금강 변을 방어하는 중요 성곽으로 위치해 있다. 또한 함라산에 이어 금강을 따라 산성이 축조된 흔적도 더러 남아 있다.

이런 많은 성곽 유적은 천사백년 전 성곽이 아직도 익산을 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돌 하나하나에 어려 있는 익산의 역사를 반갑게 받아들이는 이유다.

정완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