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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


하인애


  내 기억속의 어린시절의 엄마는 외할머니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큰 딸을 매일같이 일만 부려먹고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보낸 것이 엄마가 외할머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였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셨던 외할머니는 고집 센 큰 딸을 꺾지는 못하셨는지 외갓집에는 엄마만 유일하게 교회에 안 나갔고 불교를 믿는 집으로 시집을 오게 된 엄마는 시댁의 가풍을 따라 살게 되었다. 종가집의 맏며느리가 된 엄마는 일 년이면 열 번이 넘는 제사를 지내야 했고 넉넉하지도 못한 시집살이에 때마다 치르는 행사에 구색을 맞추느라 청춘이 지나는 것도 잊은 채 일만 하며 살아야 했다.

  아마도 내가 열두 살 가을쯤에 우리 집에 외할머니가 다니러오셨던 걸로 기억을 하는데 그 때 외할머니는 석 달 정도 우리 집에 머무르셨다. 외할머니는 일요일이 되면 늘 제일 어린 나한테 어서 교회에 가라고 재촉을 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어린 시절에 외할머니를 뵙고 난 후 나는 서른이 넘어서 외할머니의 죽음 앞에 눈물을 보이며 살아온 시절의 회한을 읊어내는 엄마를 마주하게 되었다.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말년이 되어서는 큰 딸과 작은 딸 집을 오가며 찬 밥 신세를 면치 못하신 채 지내다가 쓸쓸히 돌아가셨다. 가끔은 엄마가 그때 흘렸던 눈물의 의미를 되새기게 될 때가 있다. 딸은 엄마의 인생을 닮는다는 말이 있는데 미워하고 때로는 사랑하면서도 서로의 인생을 닮아가는 것이 엄마와 딸이라는 생각이 든다. 외모도 성격도 외할머니를 그대로 빼닮은 엄마는 다행히 아직까지 치매로부터는 안전한 상태지만 그래도 연세가 있으셔서 요양보호사의 도움으로 지내고 계신다.

  아들을 낳기 위해 딸을 넷을 낳고 마침내 두 아들을 얻은 엄마에게 나는 그저 덤으로 얻은 생명이었다. 가난한 집에서 자식을 일곱이나 키우기엔 너무 버거워서 엄마는 나를 지우려고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생명력이 강한 나는 끝내 살아남았고 결국 한 겨울 새벽에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태어나보니 이제 엄마가 나에게 줄 젖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지금처럼 분유가 흔하지도 않던 시절이다 보니 나는 그저 엄마의 젖을 그야말로 감질나게 얻어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나는 돌이 지나도록 일어서지도 못하는 영양실조에 시달리게 되었고 어찌어찌 주변의 도움으로 녹용을 먹고 그나마 건강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엄마가 만약 내 어린시절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지 않았다면 나는 어쩜 지금보다는 조금 더 평범한 성격으로 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자라면서 엄마가 외할머니를 미워했던 것처럼 나 역시도 엄마를 참 많이 원망하며 살 때가 있었다. 평생을 철없는 남편과 함께 살면서 자식들은 거의 엄마의 손으로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엄마는 굴곡진 인생을 살아오셨다. 그 세월 속에서 오직 엄마의 꿈은 그저 자식들이 잘 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었다. 지금도 엄마는 자식들을 만나면 늘 지난 시절 한 맺힌 이야기로 시간을 다 보내신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엄마인데 막내딸의 기억 속엔 아직도 집안일을 씩씩하게 해내던 엄마의 모습만이 떠오른다. 기억이라는 것은 이래서 참 오묘한 것 같다.

  지난 주말에는 초등학교 시절 동창회에 나가서 반가운 친구들을 만났다. 결혼을 일찍 한 친구들은 어느새 사위를 보고 할아버지가 된 친구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 부모님이 다 돌아가신 친구들도 적지 않았다. 동창회 모임에서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문자를 받을 때마다 나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때가 있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닥칠 일이라서 그럴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슬픔이 원망을 이기지 못했었지만 만약에 엄마가 세상을 떠나시게 된다면 참 여러 감정이 올라올 것만 같다. 뜬금없이 이렇게 날씨가 쌀쌀해질 때가 되면 어린시절 엄마가 아랫목에 감을 한 포대를 쌓아놓고 우려 주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가 해 주시는 간식거리와 음식은 세상의 어떤 먹을거리보다 맛있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은 엄마가 만들어주던 음식을 먹을 수가 없다. 다행히 엄마를 닮았는지 요리와 살림에 아주 솜씨가 없지는 않지만 내가 엄마의 손끝을 따라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제 어느새 중년이 되어가는 막내딸도 새삼 엄마의 마음을 알아가는 나이가 되어가는 것 같다. 어른이 되어버린 딸들에게 하고픈 말은 이제 그만 엄마와 화해하라는 말을 하고 싶다. 엄마와의 관계에서 있었던 일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끊을 수 없는 천륜의 인연이다. 엄마의 아름다운 모습을 닮은 딸들이 이 세상에 선한 일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딸들은 엄마라는 고전의 영인본이다.


23-11-12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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