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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의 깨달음
▲ 김영주


김영주
익산시 사회복지협의회 회장
사단법인 삼동인터내셔널 이사장

 

중국 송나라 때 소동파(시인, 1037~1101)가 있었다. 그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만큼 뛰어난 문장가였다. 당시 송나라와 당나라의 시는 매우 서정적이었다. 그러나 소동파의 시는 철학적이었다. 그가 삶과 세상과 우주의 이치에 대해서 남달리 깊은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소동파는 눈이 깊었다. 인간의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의 힘이 뛰어났다. 그래서 웬만한 스님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눈이 열렸다”고 소문이 자자한 스님도 막상 소동파가 만나보면 별 게 아니었다. 몇 마디만 주고 받아도 소동파는 스님의 바닥이 훤히 보였다. 소동파는 쥐뿔도 모르면서 ‘대사(大師)’라는 소리만 듣는다고 생각했다.

당시 북송에는 승호(承皓, 1011~1091) 스님이란 선지식이 있었다. 연배는 소동파보다 26살 더 많았다. 스님이 주석하는 곳으로 하루는 손님이 찾아왔다. 다름 아닌 소동파였다. 둘은 초면이었다. 승호 스님이 먼저 상대가 누구인지 물었다.
“그대의 존함은 무엇인가?” 소동파는 승호 스님의 속살림을 떠 볼 요량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을 했다. “저는 ‘칭(秤)’가 입니다.”

소동파가 쓴 ‘칭’이라는 글자는 ‘저울 칭’자이다. 중국에는 ‘칭’이라는 성씨가 없다. 그런데 소동파는 왜 ‘칭’가라 했을까? 소동파는 승호 스님에게 도전장을 내민 거다. “당신이 대단한 고승이라 하는데, 내가 당신의 무게를 달아보려고 왔소이다.” 이렇게 말을 한 거다. 소동파의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승호 스님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할’ 소리에 소동파는 뒤로 벌러덩 나가떨어졌다. 깜짝 놀란 소동파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승호 스님이 소동파에게 되물었다.

“그렇다면 이 소리는 몇 근이나 되는가?”

승호 스님이 던진 마지막 물음에 소동파는 아무런 답도 못했다. 눈만 껌뻑거리며 승호 스님의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이다. 왜 그랬을까? 소동파가 들고 있던 저울로는 승호 스님이 내지른 소리의 무게를 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승호 스님은 왜 ‘하~알!’하고 소리를 질렀을까?” 대체 왜 그렇게 고함을 질렀을까? 그것은 소동파가 들고 있던 저울이 아무런 쓸모가 없음을 일러주기 위해서이다.

소동파의 저울은 ‘색(色)’을 다는 저울이다. 색(色)이 뭔가?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뭔가 덩어리가 있는 것이다. 그럼 소동파가 쥐고 있던 색(色)은 무엇일까? 지식과 학식이다.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고, 엄청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던 소동파는 “나의 저울로 달지 못할 대상은 없다”고 생각했던 거다. 그래서 승호 스님은 소동파의 저울로 달 수 없는 걸 내놓았다. 그게 바로 ‘공(空)’이다. 무거운색과 가벼운 색을 따져가며 “나의 상대는 없다”고 자만하던 소동파의 저울에 느닷없이 ‘공(空)’이 얹혔다. 소리의 속성이 ‘공(空)’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동파가 뒤로 나자빠진 거다. 갑자기 지른 소리에 놀라서 나가떨어진 게 아니다. 소동파는 지금껏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살아왔는데, 승호 스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내밀었기 때문에 무릎을 꿇은 거다.

곰곰이 생각해 보자. 우리는 누구와 닮았을까. 소동파일까, 아니면 승호 스님일까. 그렇다. 우리는 소동파와 똑 닮았다. 왜냐고요? 우리도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만 쫓으며 살아왔으니까. 그렇게 ‘색(色)’만 보고, ‘색(色)’만 쫓으며, ‘색(色)’만 저울질하며 지금도 살고 있다. 그러니 소동파의 안목과 우리의 안목이 똑같다.

승호 스님은 그런 우리의 안목을 향해 망치질을 한다. 이 선문답 일화를 통해 두들긴다. 그걸 깨트리라고 말이다. 왜 그랬을까? ‘색(色)’만 붙들고 있는 삶은 힘들기 때문이다.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가령 사람들은 10년 전의 상처, 20년 혹은 30년 전의 상처도 여전히 안고 살아간다. 그걸 떠올릴 때마다 고통스러워 한다. 그리고 나에게는 바위 덩어리 같은 상처가 지금도 박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상처를 ‘색(色)’으로 보며 살아간다. 그러니 마음의 저울에 상처가 올라올 때마다 고통이 덩달아 올라온다.

승호 스님의 ‘할!’소리에 무릎을 꿇은 소동파는 산을 내려갔다. 주위에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서 있고, 그 위에서 산새들이 울어댄다. 그 아래 난 오솔길을 소동파는 걸었다. “내가 그동안 저울에 올렸던 그 모든 색(色)의 정체가 뭘까?” 그렇게 궁리를 했을 거다. 그러다 문득 깨닫게 됐다. “세상의 모든 색이 비어 있구나. 비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텅 빈 채로 작용하고 있구나. 그게 바로 이 세상이구나.” 소동파는 비로소 그걸 깨쳤다. 바로 그 순간에 소동파는 이렇게 노래를 했다.

“산색은 그대로가 법신(法身)이다.”

산색(山色)이 뭘까? 봄에 피는 꽃, 나무 위에 앉은 새들, 그들이 지저귀는 소리, 졸졸졸 흘러가는 냇물. 그 모두가 산색이다. 다시 말해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이 세상이다. 봄꽃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사라질까. 꽃이 진 자리에 맺히는 열매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까. 그렇게 피고, 지고, 피고, 지는 이 세상은 색신(色身)일까, 아니면 법신(法身)일까. 다시 말해 색(色)일까, 아니면 공(空)일까.

소동파는 이제 여기에 답을 한다. “산색이 그대로 법신이다.” 즉 “색(色)이 곧 공(空)이다”라고 말한다. 뒤집으면 “공(空)이 곧 색(色)이다”가 된다. 이걸 깊이 이해하고, 뜻을 깨치면 저마다 안고 있는 상처가 소멸된다.

그렇다면 우리도 공(空)을 달 수 있는 저울 하나 가져보면 어떨까.


23-05-21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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