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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주는 교훈

익산시 사회복지협의회장

김영주

“산이 붉게 타니 산홍(山紅)이요, 단풍에 비친 맑은 소(沼)가 붉으니 수홍(水紅)이요, 골짜기에 들어선 사람도 단풍에 취하니 인홍(人紅)이라.”

위의 글은 조식(曺植, 조선 중기 학자, 1501~1572)의 삼홍시(三紅詩)이다.

가을 색이 하루가 다르다. 단풍 때문이다. 지난달 28일쯤 전해진 설악산의 첫 단풍 소식에 “그런가 보다” 했는데 어느덧 시내 가로수들도 분위기를 달리하더니 벌써 갈색으로 퇴색되어 하나둘씩 땅에 굴러떨어져 바람에 흩날리고 있다. 일찍 땅에 떨어지는 나뭇잎일수록 넓고 크고 우렁찬 것들임을 알 수 있다. 여름내 당당하고 짙푸른 잎일수록 때가 되어 계절이 바뀌면 가장 먼저 시들고 떨어지는 것이다.

머지않아 산천에는 흰 눈이 덮이게 될 것이고 그토록 아름답던 빛깔들은 모두 다 흰 눈에 덮이어 진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면서 동시에 조락(凋落)의 계절이요 풍년의 계절이면서 동시에 비관(悲觀)의 계절이다. 그리고 가을은 우수의 계절이다. 우수라고 하는 것은 수심(愁心) 즉, 가을 마음이다.

사계절이 뚜렷할수록 세월의 흐름을 알 수 있고 사계절이 뚜렷한 지역에 사는 사람일수록 역사의식이 강한 것이다. 인생에 겨울은 활동을 쉬는 휴식의 계절이요 정신을 함축하는 계절이다. 그러므로 인생에 겨울이 오기 전에 무언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하는 독촉 앞에 우리는 서 있는 것이다.

어느 철인은 봄의 소리에서 생명의 약동을 들었다고 했다. 필자도 떨어지는 단풍을 보며 몇 가지 가을의 소리를 듣는다.

첫째, 가을은 우리에게 인간이 되라고 말한다. 가을은 우리에게 인생의 한계를 가르쳐 주고 있다. 권력의 한계를, 재물의 한계를, 그리고 힘의 한계를, 명성의 한계를 우리에게 조용한 웅변으로 가르쳐 주고 있다. 과거 역대 대통령들이 그러하였고, 내노라 하는 권력자들 또한 같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인생은 풀잎에 맺힌 아침이슬과 같다는 것을 기억할 때가 바로 이때이다. 사람들은 돈을 벌고 출세를 위해서 혈안이 되어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우리가 힘써 잡으려고 추구하던 바로 그것들이 얼마나 무상한 것인가를 이 가을이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둘째, 가을은 지난날 알게 모르게 지은 잘못을 뉘우치는 회한(悔顔)의 얼굴을 가지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병들 수 있고 그 자리에서 물어 나야 하고 누구나 늙을 수 있고 누구나 죽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건강할 때 그 건강에 감사해야 한다. 왜 그럴까? 우리는 언젠가 건강을 상실하는 날이 오기 때문이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모두에게 감사하고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일해야 한다. 그것은 언젠가는 그 자리를 내어놓아야 할 때가 오기 때문이다. 지금 이때를 감사하지 못하고 성실하게 생활을 하지 못하고 살다가 말년에 후회하고 불행한 사람을 우리는 많이 보고 있다. 이 세상에 진리의 은혜를 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진리의 은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따름이다. 인생의 가지는 되도록 연할 때 그 방향을 두루 잘 잡아야 한다. 왜 그럴까? 다 굳어진 다음에는 인생의 가지를 구부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기회는 언제까지나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 지금, 이 시간이 진리에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기회이다.

셋째, 가을은 우리에게 맑고 빈 마음 그리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한적한 오후 잔디밭에 앉아 누렇게 시든 나뭇잎을 바라보노라면 새삼 산다는 것이 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매일 먹고 일하고 자고 놀고 가치도 보람도 의미도 없는 생활을 개미 쳇바퀴 돌 듯이 1년내 반복할 뿐이다. 그 가운데 길지도 않은 생을 살면서 깨끗이 살지도 못하고 탐욕과 욕정과 위선과 허영으로 포장하여 살아가고 있는 인생이 이 가을엔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우리들 마음에 가식과 때를 벗겨버리고 나목처럼 자연인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바로 이 가을이다. 그리고 이 가을에는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지난날 누군가를 미워한 일이 있다 하여도 이 가을에는 용서할 줄을 알아야 한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 준다는 것은 나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내 잘못을 용서받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번 가을에 진리로부터 내 잘못을 용서받는 감격스러운 경험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도 타인을 용서하는 통쾌한 경험을 가져야 할 것이다.

넷째, 가을은 겨울을 준비하라고 한다. 살아 움직이는 것은 이 가을에 모두 겨우살이 준비를 한다. 감·무·사과는 가을에 단맛을 그 몸속에 저축하고, 국화는 서리가 오기 전에 부지런히 꽃을 피운다. 뱀과 개구리는 동면을 준비한다. 우리는 무엇을 준비할까? 이제 머지않아 북풍이 불어올 터이다. 봄이 오는 그날까지 버티어 나갈 희망의 씨앗을 간직할 수 있도록 자성(自性)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겨울이 오기 전에 이제까지 고백하지 못했던 것을 용기를 가지고 진리 앞에 고백해야 하고, 주위 사람들과 서로 걸리고 막힘이 있으면 이 가을이 가기 전에 풀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가을은 세월의 덧없음을 말하고 있다. 추풍(秋風)낙엽이라 했다. 여름에 싱싱하고 푸르른 초목이 하룻밤 찬 서리에 축 늘어지는 꼴은 비록 시인이 아니더라도 애틋한 마음이 아니고는 바라볼 수 없다. 이렇게 시들어가는 풀밭에 팔베개를 베고 누워서 파랗게 갠 하늘을 고요히 바라보노라면 마음이 까닭 없이 차분해지고 고독해지며 인생이란 것, 산다는 것이 과연 뭔가 새삼 물음을 던지게 된다. 섬돌 밑에서 밤 세 안타까이 울어대는 귀뚜라미의 구슬픈 울음소리, 불을 끄고 누워있을 때 창문에 고요히 흘러넘치는 달빛, 산들바람이 문풍지를 울릴 때마다 우수수 나뭇잎 떨어지는 서글픈 소리, 이렇게 가을빛과 소리는 어느 것 하나 서글프고 애닯지 않는 것이 없다. 그래서 가을은 전쟁을 치른 폐허라고 했다. 다소곳이 바람에 나부끼며 한잎 두잎 거리 위를 말없이 구르다 발길에 차이는 낙엽은 인생의 허무와 무상이 그 속에 들어있는 양 속삭여주는 것 같다.

가을은 소리 없이 이 순간도 우리 곁을 지나고 있다. 이제 며칠 후면 추운 겨울이 올 것이고 온 산야는 흰 눈으로 포장될 것이다. 그리고 이 해도 가고 우리들의 백발도 하나 더 생길 것이다. 이 시점에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하는 참회와 결단의 준비가 필요할 때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