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숲교회 담임목사

강남웅

독일 국민은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무티(mutti), 우리말로 엄마라는 별칭으로 부릅니다. 때로는 엄격하게, 때로는 푸근하게 대하는 모습이 마치 엄마와 닮았다는 뜻에섭니다. 권력을 과시하지 않고 원칙을 유지하는 가운데 다른 의견을 포용하면서도 힘 있게 정책을 편다는 그녀의 무티 리더십은 국가적 위기 때마다 빛났습니다.

통일 여파로 장기 침체에 빠진 ‘병든 국가’ 독일을 유럽연합(EU)의 최대 경제 대국으로 탈바꿈시킨 메르켈 총리는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만 수십 개에 달합니다. 동독 출신에 첫 여성 총리로, 최연소로 시작해, 최장수로 마감하게 됐는데, '자발적으로 퇴임하는 첫 총리'라는 수식어도 하나 추가했습니다. 지난달 말 치러진 총선과 함께 16년간의 총리직에서 물러나는 것이지요.

메르켈의 리더십에서 가장 돋보이는 요소는 그의 소통능력입니다. 메르켈은 상대의 말을 자르거나 거절하지 않고, 따뜻하게 들어주면서 소통으로 설득하는 능력을 발휘해왔습니다. 유로 존 위기 때도 각국 대표들이 발언을 하게 하면서, 모든 상황을 경청하고 서로 이해의 폭을 넓히면서 최대공약수를 만들어냈습니다. 협상력과 리더십으로 여성 정치 지도자로서 성공을 이끌 수 있는 롤모델을 보여주고 있는 메르켈의 정치신화는 지도자를 꿈꾸는 이들이 본받고 배워야 할 리더십의 교과서라 믿습니다. 

관저 대신 작은 아파트에 살면서 퇴근길에 동네마트에서 직접 장을 보는 총리, 주말에는 채소밭을 가꾸어야 한다며 미국 대통령의 취임 인사 전화를 미루는 독일 총리, 역대 총리 중 가장 어린 쉰 한 살, 그것도 여성에, 동독 출신으로 총리가 된 메르켈은 어느덧 예순 일곱 살이 됐습니다. 독일 청소년들은 '남자도 총리를 할 수 있냐'고 물을 정도로 메르켈의 16년 총리생활은 독일에게 당연한 일상이었습니다.

독일 언론은 메르켈 리더십의 특징을 권력을 과시하지 않고서도 정책을 힘 있게 추진하는 것이라며 이를 ‘메르켈리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대처리즘’ · ‘레이거니즘’이 노조 탄압과 공권력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가리키는 반면, 메르켈리즘은 갈등 상황을 해결하는 리더십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메르켈리즘의 특징으로 첨예한 갈등 이슈를 둔화시키는 능력으로 정의하고, 메르켈은 비전이나 이데올로기 같은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 등 실용주의자의 모습을 보이면서 반대 세력과의 첨예한 갈등을 진정시키는 전략을 실천해왔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실제 메르켈은 그간 좌파의 정책을 과감하게 수용하는 등 이념에 얽매이지 않는 면모를 보여 왔습니다. 징병제 폐지, 가정 복지 강화, 양성 평등 정책 등 사민당과 녹색당의 핵심 주장을 전격 수용했으며,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에는 원자력 발전소 폐기를 전격적으로 결정했습니다. 이전까지 원전 신봉자였던 메르켈의 대변신이었습니다.

포브스는 작년까지 10년 연속 메르켈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선정했고, 퓨리서치센터 조사에서도 세계지도자 중 신뢰도 1위를 기록했을 정도입니다. 그런 그가 정계를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독일인과 유럽인들의 사랑은 식을 줄 모릅니다. EU 대통령직이 있다면 누굴 뽑겠느냐는 설문에 많은 유럽인이 메르켈을 꼽고 있습니다.

16년을 장기 집권하고 이제 퇴임이 불과 석 달 남았는데 국민들은 여전히 그녀에게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지지율 63%. 임기 말, 권력자에 대한 국민 지지가 하락하는 것을 당연한 정치적 결말로 지켜봐 온 우리로선 이 수치가 놀랍고 부럽습니다. 대선정국이 한창이지만 한국판 메르켈 리더십을 찾기가 쉽지 않아 무척이나 아쉽게 생각합니다. 대선 주자들의 성찰과 분투를 촉구합니다. 그리고 독일인에게 자신감을 남기고 떠나는 메르켈 총리의 아름다운 퇴장이 한국 정치에도 찾아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