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고조 유방과 천하를 다퉜던 항우의 최후를 역사는 이렇게 전한다. 항우는 한신과 치른 해하 전투에서 참패했다. 그가 천신만고 끝에 자신의 기반인 강동으로 갈 수 있는 오강(烏江)에 이르렀다. 측근들은 빨리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서 다시 세력을 모아 재기하라고 권했다.
항우가 말했다. 자신을 따랐던 8천의 강동 젊은이들이 모두 죽고 26명만 남았으니, 강동 백성들이 용서할지라도 자기 스스로 용서할 수 없다고. 배가 떠나자 그는 단기로 적군 수백 명을 죽이고 많은 부상을 입었다. 그는 한군(漢軍)으로 자신에 맞선 옛 부하에게 “유방이 내 목에 천금과 만호를 걸었다는데,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겠다.”고 말하고 목을 베어 자살했다.
역발산 기개세를 뽐내던 그의 최후는 비참했다. 더 비극적인 사건은 그의 죽음 이후 벌어졌다. 그가 죽자 서로 그의 시신을 갖으려고 난투극을 벌이다 여마동을 비롯한 5명이 그의 목과 사지를 차지했다. 나중에 시신을 맞춰봤더니 항우인 것으로 확인됐다. 그 공으로 5명은 공신이 돼 봉지를 받고, 나중에 공동으로 시호(諡號)까지 받았다.
수많은 아군을 잃고 전쟁에서 진 장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법이다. 무슨 낯짝으로 살아 돌아가 다시 기회를 달라고 손을 벌리겠는가? 차라리 자신의 과오에 대한 책임을 지고 목숨으로 사죄하는 게 뜻을 펴겠다고 나선 자의 자세여야 한다. 항우가 마지막 순간에 저런 결기를 보였기에, 그나마 지금까지 용장으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으리라.
항우는 거병 후 8년 동안 70여 전투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그의 패배는 예정돼 있었다. 첫째, 교자필패(驕者必敗)라! 그는 연전연승으로 교만해졌다. 자신의 승리를 하늘의 뜻으로 생각했을 정도였다. 둘째, 교지졸속(巧遲拙速)이라! 그는 잔혹한 성품과 달리 결정적일 때마다 우유부단했다. 대전략가 범증이 짜 놓은 전격적인 필승 카드를 번번이 망쳐버렸다. 셋째,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 그의 리더십에는 믿음이 없었다. 한신과 진평 등 당초 그를 따랐던 인재들이 그를 떠나 한고조의 천하통일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어찌 항우가 천하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민주당이 재보궐 선거에서 참패했다. 천만 촛불 시민의 열망으로 2017년 문재인 정권이 출범했고, 2020년 총선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그런데 불과 1년 만에 개박살났다. 다자 대결도 아니고 양자 대결에서 엄청난 차이로 졌다. 그 높던 정당지지율도 다 까먹고 수구정당에게 역전 당했다. 대선 후보 지지도에서도 이재명이 공식적으로 정치참여를 밝히지 않은 윤석열에게 밀리는 어처구니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왜 압도적 지지를 받았던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이 이 꼴 났는가? 뜯어보면 민주당이 참패할 이유가 없다. 자국 이기주의로 상식적인 국제관계를 어지럽히는 미국, 중국, 일본 사이에서도 남북 관계를 비롯한 외교를 잘했다. 1918년 세계를 휩쓴 스페인 독감 이후 최악의 팬데믹인 코로나19 사태 속에서도 방역과 거시경제에서 훌륭한 성과를 거뒀다. 임기 말에 터져 나오는 대통령 관련 비리도 없었다.
물론 고 박원순 관련 사건은 진상이 확정되지 않았지만, 이번 보궐선거 원인에 대한 정치적 책임이 민주당에게 있는 건 분명하다. 코로나19 팬데믹을 전후하여 엄청나게 풀린 글로벌 유동성 때문에 부동산 가격이 폭등한 것도 사실이다. 방역 강화조치로 서민경제가 큰 타격을 입고, 일자리 사정이 악화됐으며, 그 결과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된 것도 맞다. 하지만 단지 이런 이유가 이번 참패를 초래한 건 아니다.
나는 현 정권과 민주당이 항우처럼 비쳐졌다고 생각한다. 부패정권과 수구정당에 대한 반동으로 수년 동안 얻은 승리를 자신들의 공으로 착각하여 교만해진 건 아닌지? 막강한 힘을 몰아줬는데도 언론·검찰·사법 개혁에 가시적 성과를 내기는커녕 이들에게 끌려 다녔으니, 힘쓸 능력도 의지도 없는 또 하나의 수구집단으로 비쳐진 건 아닌지? 조국, 추미애 등의 개혁 추진을 위해 국민의 이름으로 검찰을 다스리지 않고 안일을 꾀한 믿음 없는 집단으로 각인된 건 아닌지?
선거 참패 후 항우처럼 무한 책임을 지는 자도 없는 정당, 항우의 시체를 나눠 공을 누린 5명처럼 5명이 나서 개박살난 이유를 검찰 개혁 갈등과 문재인 정부로 몰아가는 정당, 그동안 적폐언론들이 수구세력의 나팔수가 돼 온갖 왜곡과 음해로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릴 때는 무력했다가 패배원인을 언론에게 돌리는 정당. 당원은 아니지만 40년 가까이 지지해온 나도 민주당 꼴 보기 싫다. 하물며 중도층은 오죽하겠는가?
그래도 어찌 하겠는가? 그나마 민주당이 차악인 것을! 대통령 문재인에게 바란다. 남은 1년 동안 개혁을 밀어붙여 수구의 집권만은 막아 달라. 만년 지역여당으로 꿀 빨아온 호남 국회의원에게 바란다. 전라도가 왜란 극복, 갑오혁명, 항일의병, 민주화운동의 밀알이었던 것처럼, 당신들이 개혁과 민주당의 정체성 확립에 앞장서라. 정치적 부담도 적지 않은가?
민주당은 개혁을 원하는 강동의 자제 태반을 잃은 책임을 져라. 안팎의 수구에 맞서 결사항전의 자세로 싸워 이김으로써 속죄하라. 정치인은 지지자를 위해 싸우는 전사다. 전사에게 내일은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