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만길/지역농업연구원장

지긋지긋하다는 2011년을 보내며 슬픈 소식 하나가 또 날아들었다. 민주화운동의 상징이셨던 김근태 선생의 타계소식이다.

필자에겐 오랫동안 민주화운동의 선배요, 큰 형님이요, 정치개혁의 모범으로 지근거리에서 뵈었던 분이셨다.

그럼에도 굳이 선생이란 호칭을 쓰는 것은 그 분의 삶에 비춰볼 때 필자의 삶이 민주화운동의 후배로서, 인생후배로서, 정치개혁을 하려는 후배로서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것 같은 송구함에 그저 선생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분에 대한 예의일 것 같기 때문이다.

김근태 선생은 1965년 대학입학 이후 줄곧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전선에서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고난의 삶을 사셨던 분이다.

서울대 상대 학생회장 시절에는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집회를 주도한 것 때문에 강제 징집되어 힘겨운 군 생활을 해야 했다.

1970년 복학한 김근태 선생에게는 또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19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혹독한 고난을 겪어야 했다.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가 민주화운동 세력과 야권을 말살하기 위해 만들어낸 사건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1970년대 있었던 4.27선거 결과에 위협을 느낀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꿈꾸며 서울대생 4명과 사법연수원생 1명 등 5명이 대학과 하숙집에서 모의해 학생데모 유도, 중앙청 습격, 정부전복 등을 시도했다는 것이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의 요지였다.

이 사건으로 1979년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무려 10여 년간을 지명수배 되어 도피생활을 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본격적으로 대중들 앞에 나선 김근태 선생은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만들어 청년, 학생, 민주화운동가들의 희망이 되었다.

학생들에게는 존경하는 선배요, 청년들에게는 믿고 따를 만한 동지요, 재야운동가들에게는 자랑스런 동지이자 후배였다.

그는 1985년 악명 높던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갈 때까지 두 차례 민청년 의장을 역임하면서 학생운동과 재야운동을 연결하는 청년들의 민주화운동조직을 이끌며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그가 당한 상상하기도 끔찍한 고문으로 죽음의 자리에까지 갔다는 그는 평생 고문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전기고문, 물고문, 가혹한 폭행 등으로 파킨슨병을 얻게 되었고 케네디기념재단은 옥중에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된 그에게 케네디국제인권상을 수여했다.

석방된 김근태 선생은 재야 민주화운동의 총결집체인 전민련활동 때문에 또다시 투옥되어 영어의 몸으로 고난을 겪었다.

그는 민주화운동의 상징에서 이미 대부가 되었고 전두환 정권은 그를 탄압하는 것으로 민주화운동의 여세를 꺾으려 했다. 숱한 고난과 투옥을 견딘 후 독재정권을 꺾기 위해서는 정치변화와 야당의 집권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1996년 15대 총선에 출마해 도봉갑에서 연속 3선을 하기도 했다.

그는 야당 내에서 대표적인 세력을 이끌고 있었고 가장 훌륭한 국회의원이자, 언젠가 대통령을 해야 할 사람으로 인식되었지만 야당대표와 보건복지부 장관을 끝으로 18대 총선 패배와 건강악화로 끝내 그 꿈을 펼치지 못한 채 타계했다.

김근태 선생은 타계 직전까지 이명박 정권의 퇴행적 정치행태로 인한 국가위기 앞에서 범야권과 시민사회의 단일대오 형성을 촉구했다.

이명박 정권을 종식시키는 것이 자신의 마지막 소명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필자의 존경하는 스승이요, 선배요, 동지인 김근태 선생을 보내며 세한고절을 떠올려 본다.

세한고절은 고려말, 조선초의 학자요, 문인인 운곡 원천석의 병와가곡집에 수록된 시에 등장한다.

원천석은 온갖 추위와 풍상에도 그 푸르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를 가리켜 세한고절이라 했다.
비슷한 말로 오상고절이 있으니 서릿발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외롭게 지키는 절개의 국화를 지칭하고, 아치고절은 아담한 풍채와 높은 절개의 매화를 지칭하는 것이나 김근태 선생의 삶은 세한고절이 가장 적절한 표현일 듯  싶다.

까닭은 국화처럼 만개하지도 못하고 매화처럼 화사하지도 못한 채 오직 푸르름으로 세파와 모진 추위를 견디며 살다갔기 때문이다.   

외유내강의 타고난 품성 탓이지만 대통령을 할 사람이 그렇지 못했으니 철학이 없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나라꼴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두고두고 통탄할 일이다.

총선패배, 대선패배의 후과로 이명박 정권의 부도덕한 정치행태를 지켜보던 김근태 선생의 마음은 제주도에서 쓸쓸히 귀양살이를 한 채 끝까지 제자의 도리를 다한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 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민주화운동의 한 세대가 떠났음을 느끼며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세한고절이란 운곡의 시구를 되새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