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출근하니 관리소 아저씨가 책을 가지고 왔다. 마침 보고 싶었던 책이다. 약국 문을 열기 전 누가 나를 위해 건네고 간 모양이다. 그 책이 보고 싶어 도서관을 찾았을 때 이미 다른 사람이 빌려간 뒤였다.

3권이다. 나는 읽을 책이 쌓여있으면 행복하다. 적금통장의 수가 늘어나는 것처럼 부자가  된 기분이다.

신혼시절 단칸방에서 TV도 없이 살 때였다. 첫 적금을 타서 세계문학전집 백 권짜리 한 질을 들여놓았다. 그때 그 기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내 상가에 내 약국을 장만했을 때보다 더 뿌듯했던 것 같다. 그냥 쳐다만 봐도 배가 불렀다. 세상이 다 내 것 같았다.

언제부턴가 우리 아파트 애기엄마들이 내게 책을 갖다 주기 시작했다. 나는 약국에 혼자 있을 때면 주로 책을 본다. "언제나 책을 보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말했던 젊은 엄마가 제일 먼저 책을 갔다 줬다.

나도 집에 있는 책을 한권 한권씩 약국으로 가지고 나왔다. 이제는 약장 한 칸이 아예 책으로 채워졌다.

우리 집에는 읽지 않은 사람에게 줘야할 책이 많았었다. 내가 읽은 책을 애들이 크면 필요로 할지 몰라 책장에 열심히 꽂아두었었다.

일본사람들은 자기가 읽은 책 중에서 서재에 놓고 두고두고 봐야할 책이 아니면,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이 책 읽지 않았으면 갖다 보라며 그냥 준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일본인들의 개인 독서량이 많은 것도 이런 사회적 분위기 때문 일거란 생각이 든다.

일본 사람들 얘기를 듣고, 나도 약국 안에 책을 돌려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볼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바로 길 건너에 글방이 있어서 그만 두었었다.

몇 해 전 알고지내는 개척교회 목사님이 교회 안에 조그만 도서관을 만들었다. 나는 내 책들을 모두 교회에 보내기로 했다. 대부분 그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소설이나 산문집 등이다.

하나씩 박스에 담는데 "한국의 명시" 라는 빛바랜 시집이 눈에 띄었다. 책표지를 열어보니   "축 생일" 이라고 쓰여 있다. 고등학교때  친구들이 돈을 모아 사 준 생일선물 이었다.  나까지 여섯 명이 친하게 지냈었다. 도서관이고 빵집이고 떼 뭉쳐 다녔던 기억이 새롭다.

유치환님의 ‘행복’ 이란 시를 읽고 외우며 나는 또 얼마나 우쭐했었던가. 나만 알고 있는  것 같은 은밀하고 부유한 기분이란...

그때 나는 이 시집 때문에 많이 행복했었다. 이 시집을  따로 빼 놓았다.

요즘 시는 난해하다. 서정적이지도 않다. 요즘 학생들은 내가 학교 다닐 때에 비해 여유가 없다. 낭만적이지도 않다. 처음부터 끝까지 점수고 경쟁이다. 이런 세태가 서정시의 부재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내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다. 다시 시집을 박스에 담았다. 

교회도서관 벽면을 가득 채운 책들을 보니 신혼 때 작은방에 문학전집을 들여놓았을 때처럼  가슴이 설레었다. 나는 시집을 책장에 꽂지 않고 책상 위에 펴 놓았다. 개권유익(開券有益) 이라고 했던가.

내 책장이 텅 비워진 뒤로 고등학교 선생인 딸아이가 책을 자주 사다줬다. 얼마 전에는 ‘연을 쫓는 아이’ 란 소설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아프가니스탄의 문화 풍속 역사를 덤으로  알게 되었다. 연을 쫓는 아이를 빌려갔던 애기엄마가 ‘천개의 찬란한 태양’ 을 읽으라며 주고 갔다.

글방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부동산이 생겼다. 조제실 쪽에 있는 책들을 바깥쪽으로 내 놓을까 궁리를 하고 있는데, 이웃 아파트 새한이 엄마가 책을 한 아름 보듬고 들어온다. 그 얼굴이 봄 햇살보다 환하다. 나는 지금 어떤 책을 먼저 읽을까 행복한 고민 중 이다. 책 고플 날이 없는 나는 세상에서 제일 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