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 이름이 있다. 그리고 그 이름으로 살아간다. 그냥 잡초라고 알았던 잡다한 것들도 이름이 있다. 그 들풀의 이름을 알게 되었을 때, 그 풀이 자기의 이름과 어쩌면 저리도 딱 어울릴까 감탄한 적이 많다. 그런 야생초는 더욱 정겹고 이름도 오래 기억된다. 토속적이고 향토적인 풀 이름은 참으로 살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가끔 내 이름을 생각해 본다. 나하고 잘 어울릴까. 아니 내 이름에 맞게 살아가고 있을까. 성명학에선 사주는 선천적 운이고 이름은 후천적 운이라고 한다. 내 이름엔 행운이 있을까.

학교 다닐 때는 이름 때문에 놀림도 많이 당했다. "복순이가 시집가고 삼돌이가 장가가네" 이런 노래가 유행하던 때였다.  민감하던 어린시절이라서 부끄럼을 탔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이름이 촌스러워 싫었다. 예쁘고 세련된 이름의 친구들이 부러웠다.

이런 내가 내 이름을 사랑하게 되었다. 밭농사를 하면서, 태생적인 풀의 이름을 알아가면서 부터일 것이다. 몇해 전 인도 여행 때다.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고 공항에서 만났다. 다들 모르는 사람들이다. 여행 도중 자기소개 시간이었다. 윤복순이라고 내 이름을 밝히니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모습과 이름이 익산이라는 시골과 잘 맞아 떨어지는 모양이었다. 마치 들풀의 이름처럼 말이다.

내 이름은 아버지가 직접 지어주셨다. 아버지는 아들이 없는 큰 댁으로 양자들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바라는 아들 대신 딸 셋을 내리 낳았다. 첫째와 둘째까지는 그렇다치고 나까지 또 딸이라니. 할머니의 서운함은 하늘을 찔렀고 어머니는 그 앞에서 쩔쩔맸다고 했다.

새 생명이 태어났는데 잔치집은 커녕 초상집이었단다. 더구나 언니와 나는 다섯 살 터울이다. 갓난이는 찬밥 신세였단다.  윗목 구석에 밀어붙혀 놓았단다.
아버지는 달랐다고 했다.

"야는 딸이라도 복덩이여. 오늘 논 사려고 계약하고 왔구먼."

아버지의 이 한마디로 나는 아랫목을 차지할 수 있었단다. 할머니의 구박도 차츰 덜했다며 어머니는 웃었었다.

복 복자에 순할 순, 얼마나 좋은가. 아버지는 날이 밝자마자 호적에 올렸다고 한다. 그 당시 시골에선 한 두해 늦은 출생신고가 다반사였다는데.

아들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던지 내 이름은 종미로 바뀌었다. 그렇게 불러야 아들을 낳는다며 작명가가 지어 주었단다. 동네에선 모두 종미라고 불렀다. 그래도 아버지는 무슨 믿음이 있었던지 호적까지 바꾸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이었다. 이름을 부르고 반이 결정되었다. 윤복순을 부르는데 대답하는 아이가 없었다. 한참 뒤 어느 마을에 사는 누구의 딸이라는 설명을 듣고서야 나인줄 알았다. 

학교생활이 시작 되면서 나는 복순이란 이름을 찾았고, 현역으로 직업을 가지고 있는 한 이 이름으로 살아 갈 것이다.

돌이켜보니 나는 싸남을 부려 본 적이 없다. 속으로 울어 본 적도, 병원에 입원해 본 적도 없다. 모두 다 이름 덕분이 아닐까.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 이 말을 어릴 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정신이 중요한 줄 알았다. 요즘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신체에서만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는 중이다. 몸도 마음도 건강한 나는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감사하는 마음은 나를 편안하게 한다. 약국에 오는 손님들도 우리 약국은 편안해서 좋다고 한다. 나는 물론 내 주위를 편안하게 할 수 있다면 이건 엄청난 복이라고 생각한다. 내 이름엔 분명 후천적 운이 있다고 믿고 싶다.

순하게 산다는 것은 순리대로 산다는 뜻일 것이다. 순리대로 살다보면 복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닐런지.

좋은 이름을 지어주신 우리 아버지는 이런 내 마음을 하늘에서 흐뭇하게 보고 계실 것이다. 나에게 딱 어울리는 이름으로 지금처럼 이렇게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