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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주의

원광대학교 경찰행정학부 교수, 법학박사 / 장규원

정의를 쫓는 사람

인간의 역사를 통해 크게 세 부류가 세상을 좌지우지 현혹했다고 한다. 아주 오랜 옛날 사람의 생각이 좀 덜 깨쳤다고 하던 시절에는 주술사나 제사장이 사람들을 홀렸다. 자연의 이치를 몰라 천둥 번개도 무서워 벌벌 떨던 시절이다. 그 때 제사장의 말은 곧 하늘이 아니었을까? 중세 시대를 흔히 암흑의 시대라고 한다. 왜 암흑의 시대라고 했을까? 신만이 존재한 시절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위 ‘신의 이름으로’ 성직자들이 세상을 재단하였다. 오늘날에는 법치주의를 이야기 한다. 법으로 모든 것을 말하려드니 변호사가 난리다. 주둥아리로 여기저기 붙어서 ‘법의 판단’을 꼬드긴다. 골트문트(Goldmund), 곧 ‘황금의 주둥아리’ 시대다. 그래서인지 도처에서 떠들어댄다. 정의사회구현…, 정의로운 사회를 지향하고…

살아가면서 참으로 많이 들어보는 표어 중의 하나다. 너무나 좋은 말이기에 되레 진부하기 짝이 없다. 주위를 돌아보면 여기저기 부정의스러운 것 같은데, 뭔 놈의 정의란 말인가.

정의의 핵심은 평등에 있다고 한다. 평등은 보편타당한 성격을 띠고 있다. 그래서 누구나 어디에서나 언제나 정의를 지향하는 사람은 합치될 수 있는 소지가 있다. 환영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의라는 보편적 가치가 아무리 중요해도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경우에 내용적으로 무엇이 정당하다고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에 공허하다. 실컷 먹어도 배고픈 꼴이다.

절차도 정의롭고(fair procedure) 또한 결과도 정의로울 수 있다면(just result) 더없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가운데 하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다른 하나는 무시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왕왕 있다. 예컨대 가난한 사람에게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해 주기 위해서 부자에게 그가 원하지 않는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는 부당한 절차가 요구될 수 있다. 또는 형사적 정의의 관점에서 법관은 공정한 절차를 마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재판의 결과는 무고한 사람이 처벌되거나 벌 받아 마땅할 죄인이 풀려나는, 그야말로 정의롭지 못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그런 벌을 받아 마땅하다’ 또는 ‘당연한 응보의 대가를 치렀다’고 말한다. 보통 형사법적 관점에서 정의가 이루어졌다고 인정하는 예가 될 것이다. 범죄행위에 대한 응보나 응분의 처벌이라는 것이 곧 형사적 정의라고 하는 데에는 누구나 끄덕이며 수긍한다.

역지사지

법이 정의만 꾀한다면 어떨까? 정의는 법이 추구하는 절대적 가치이긴 하지만,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다루는 기준과 내용을 정할 수가 없다. 정의만 따지다가는…

한 줄기의 강이 가로막는 가소로운 정의여! 피레네 산맥 이편에서는 진리, 저편에서는 오류! 파스칼(Blaise Pascal)은 <팡세>에서 이렇게 상대성을 이야기했다. 같은 것과 같지 않은 것을 구별할 기준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정의와 함께 합목적성을 이야기한다. 정의를 쫓는 법은 일정한 목적에 알맞은 방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법의 목적을 무엇으로 정하느냐에 따라 상대적으로 정의의 내용이 채워진다고 할 수 있다.

자칫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부정적인 의미의 상대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허나 분명한 것은 법은 ‘내 것이 절대적이 아니기 때문에 네 것도 절대적이 아니다’가 아니라 ‘내 것이 소중하기 때문에 네 것도 소중하다’는 마음가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법치주의에 바탕을 둔 정의 사회는 그렇게 다가가야 한다.

옳고 그름이나 선과 악을 판가름하는 절대적 기준이 있는가?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다’라는 명제는 모든 상황에서 옳은 것이 아니다. 수학적 연산법칙에 따라 계산을 하는 경우에만 옳다. 물 한 방울에 물 한 방울을 더하면 커다란 물 한 방울이다. 위아래는 상대적인 이름이다. 누가 누구보다 얼마나 더 높고 낮은가를 따지는 것은 더 없는 짓거리다. 누구에 비해 얼마나 더 높고 낮은지는 또 다른 누구 앞에 서면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 못한다.

각각의 판단은 오직 다른 것과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정해진다. ‘같은 물에 다시 발을 담글 수 없다’는 어느 그리스 철학자의 말은 어떠한 것도 항상 동일하게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이 있다. 상대방의 처지에서 바로 볼 수 있는 지혜를 갖자는 말이다. 그 지혜가 정의만의 법을 일깨워줄 수 있는 것이다. 정의만이 법이 아니라고…

낮은 데로 임하소서…

정의, 평등, 인권, 자유, 관용…. 이른바 인류 보편의 가치라 하는 덕목들이다. 이 모든 가치가 진실로 소중하다면, 왜 그것이 훼손될 때 이를 바로잡으려는 움직임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가. 이런 보편 가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불의와 악은 또 얼마나 자주 목격되는가.

거짓말하는 것은 나쁘고, 남을 도와주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느낀다. 그런데 남을 때렸다 해도 그것이 다수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왔다면 그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좋은 결과만 가져온다면 그 의도와는 상관없이 옳은 행위라고 여길 수 있는가? 과연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 헷갈리게 한다.

한 사람이 불쌍한 사람을 보았어도 그냥 모른 체 지나가는 경우 칸트(Immanuel Kant) 이전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칸트 이후엔 이러한 행위는 ‘의무 결여'라는 근거로 윤리적이지 못한 행위이다. 짐승이 아닌 사람이라면 마땅히 윤리적인 행위를 해야 한다는 그러한 의무를 윤리에 부과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윤리적인 행위를 해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되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윤리적으로 비판받을 정당성 또한 생겼다.

옳고 그름의 문제, 윤리적이다 아니다의 문제, 선과 악의 문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고, 앞으로도 풀리지 않는 화두임에는 틀림없다. 우리가 만들어낸 모든 법과 도덕, 윤리, 규범, 관습 등은 결국 선과 악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이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존재한다.

범죄자에 대한 대책이 수없이 마련되어 시행되고 있지만, 범죄를 줄이는 일에 아무런 진보도 꾀하지 못했다. 이론은 많지만 그저 언저리만 맴돌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자신의 설명이 맞는다고 생각되는 사실뿐만 아니라 틀렸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하지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하지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樂之者)고 했다. 그려… 옛 성현의 말씀대로 즐기는 마음으로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