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대학교 경찰행정학부 교수, 법학박사 / 장규원

주체와 객체

빠지면 몰입하기에, 적당함을 읊조리며 지내건만, 빠져버렸다.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에 빠졌다. 전통 사극이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으니 맘껏 펼칠 수 있는 발칙함에 좋고, 금기(禁忌)의 높다란 벽을 넘어버리니 자유로워 좋다.

남장 여인 김윤식 유생은 성균관을 흔들다 박사에 탄로 났다. 계집이라는 것이. 어느 시대라고… 성균관의 명예부터, 강상의 도, 지엄하신 어명에의 누까지… 겁(劫)의 세월인양 켜켜이 쌓여온 제약 앞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살기 아니면 죽기이기에 비장하다. 그래 무릎 꿇고 차라리 하늘을 향한 독백이듯 주장한다.

“기회를… 기회를 주십시오. 살아 처음입니다. 학문이란 무엇인지. 난생 처음 질문도 갖게 되었습니다. 난생 처음 제 재주를 알아봐주는 이도 만났고, 난생 처음 제 편이 되어주는 이도 만났습니다. 이런 제게도 기회를 주십시오. 이 세상에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새로운 세상을 꿈 꿀 기회를 저에게 허락해 주십시오.”

그녀가 꾸고자 하는 새로운 세상이란 어떤 세상일까? 그녀가 이 세상에 던지고 싶은 질문은 무엇일까?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정확히 아는 일을 인식이라 한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그녀는 분명하게 인식한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믿는 일이다. 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이다. 나는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정확하게 인식하여야 한다.
인식이란 결국 주체화와 객체화의 투쟁이다. 원초적 맥락에서 말하자면…

개구리는 자기 앞에 기어가는 개미를, 뱀은 개미를 노리는 개구리를, 하늘의 독수리는 저 아래 기어가는 뱀을, 사냥꾼은 독수리를… 인식한다. 인식하는 자는 죽이고 인식당하는 자는 죽는다. 주체가 될 것이냐 객체가 될 것이냐, 이것이 곧 인식의 원초적 상황이 아니겠는가. 인식하는 자는 주체가 되는 것이고, 그 대상이 되는 자는 객체가 되는 것이다.

조금은 다른 주체와 객체

죄가 죄이기 위해서는 죄의 성립요소인 사실을 인식하여야 한다. 형법 제13조에 적혀있는 내용이다. 숱하게 많은 행위들이 존재한다. 그 많은 행위들 중 어느 행위는 칭송을 받고, 어느 행위는 벌 받아야 한다고들 떠든다. 그 벌 받아 마땅하다는 행위를 몇 자 안되는 글자로 유형화해놓고, 그에 해당하는 사실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벌을 논한다. 곧 죄의 사실을 인식하고 꾀했다는 고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 맞다. “인식하는 자는 주체가 되는 것이고, 그 대상이 되는 자는 객체가 된다.” 죄를 논할 때 행위의 주체가 누구이며, 행위의 객체는 누구인가 늘 따진다. 범죄는 인간의 행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누구나 주체가 된다.

“인식하는 자는 죽이고 인식당하는 자는 죽는다.” 인식당하는 행위의 객체는 결국 피해자다. 사기의 피해자일수도 있고, 살인의 피해자일수도 있다. 범죄는 인간의 행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누구나 또한 객체가 된다.

그러고 보면 범죄도 <동물의 왕국>에서와 같이 물고물리는 투쟁이요, 그러기에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뒤르켕(Emile Durkheim)은 범죄를 결혼이나 이혼과 같이 우리 사회의 늘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았던가.

살아가면서 다툼도 많고 사고도 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혀 원만한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면 소송을 통해 시시비비를 가린다. 소송이란 원고라는 주체와 피고라는 객체가 대립적인 당사자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그들의 공격과 방어에 대하여 제3자의 위치에 있는 법원이 판단을 내리는 절차를 말한다. 너와 너의 싸움을 내가 듣고 누가 옳은지 알려주마고 우르르 모여 있는 동네 꼬마의 모습, 전형적인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의 모습이다.

그러한 우리들의 놀이에는 민사소송절차, 형사소송절차, 행정구제절차, 헌법소원심판청구절차 등이 있다. 민사소송은 사인으로부터 부당해고를 당했거나 재산상 손실을 입은 경우와 같이 사인 상호간 진행되는 절차요, 행정구제는 행정 기관의 부당한 행위로 인하여 권익을 침해당하였을 때 행정 기관이나 법원에 그 시정이나 손해보전을 구하는 절차이고, 헌법소원심판청구절차는 헌법정신에 위배된 법률에 의하여 기본권의 침해를 받은 사람이 직접 헌법재판소에 구제를 청구하여 그 법률의 효력을 다투는 절차이다.

여기서 형사소송은 죄를 인정하고 벌을 과하는 절차이다. 범죄가 발생한 경우 그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찾아내고 범죄의 증거를 찾고 그 혐의를 밝히기 위한 수사가 진행되며, 범죄 혐의가 있다고 인정되면 법원에서 죄의 사실을 놓고 따지고 그리고 형의 선고와 함께 집행의 순서로 형사절차가 진행된다.

이러한 절차의 주체는 누구인가? 국가권력이다. 그 국가권력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약한 위치에 있는 객체는 곧 범죄자이고, 우리는 이들에 대해서 인권을 보호하면서도 형사사법의 발동에 의하여 정의가 실현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절차에는 주체인 국가와 객체인 범죄자만이 덜렁 남아버려다. 피해자는 어디로 간 것일까? 피해자는 주체인가 객체인가. 범죄가 있으면 항상 그 피해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피해자를 문제 삼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일로 생각한다. 그래도 사람들의 인식은 많이 바뀌어간다. 범죄자만 놓고 생각하다, 이제는 피해자도 아울러 생각한다.

보듬는 주체와 객체

있어서는 안 되지만, 사람 사는 사회에 있을 수밖에 없는 범죄이기에 물고물리는 인식의 고리마냥 죄와 벌의 틀에서, 켜켜이 쌓여온 제약의 틀에서 맴돌아야만 할 것인가.

“기회를 주십시오”라고 외친 남장 여인의 성균관 유생마냥, 고착화된 인식의 틀을 툴툴 털어버리지는 못했지만 넌지시 기회를 주는 이나 서로 보듬고 일어설 수 있는 주체와 객체일 수는 없는가.

조금만 신경 쓰고 들여다보면 도처에서 법치국가라는 말을 떠들며 이야기한다. 법치인지 법만능인지 헷갈린다. 누구를 위한 법인가. 전통 사회에서 법이란 결국 권력을 가진 주체의 것이 아니었나? 한비자의 법가사상도 철저하게 왕권 강화를 위한 생각일 뿐이었다. 그런 바탕이 면면이 이어져온 것인지 휘두르는 것이 능사라 여긴다. 툭하면 처벌법이요, 여차하면 특례법인자라 기본이 되어야 하는 법은 뒷전에 밀려날 때도 있다. 주체가 주체이지 못할 때가 있는 것이다.

또 조금만 신경 써서 주변의 사정을 들어보자. 친족이나 가족의 속앓이, 이웃 간의 사소한 시비에서 크게 번져 얽혀진 사건, 직장이나 주위에서 벌어진 갈등을 형사 사법적으로 죄의 유무만을 가려 처벌하는 것이 옳은 처사인가 고민할 필요가 있다. 당사자 간의 모욕 여부, 특정인의 비리 주장 등에 깔린 갈등의 근본 요인을 원만하게 해결하지 못한 채 사건을 종결할 경우 또 다른 제2, 제3의 고소와 소송으로 이어져 더 많은 사람이, 더 오랜 기간 동안 소모적인 일에 얽매여 휑해지는 꼴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전통적인 죄와 벌의 체계는 참으로 무력하다.

너와 나가 보듬으면 우리가 된다. 우리를 확장된 나로서 이해한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집합체로서 주체를 말할 수 있다. 기회를 주고, 당당히 기회를 요구할 수 있는 사회. 그 하나하나의 구성원은 모두가 인식(Wissen)의 주체, 곧 앎(Wissen)의 주체이다. 나를 알기에, 너를 알기에, 우리를 알기 때문에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기회를 달라고 할 수 있고, 그리고 기회를 줄 수 있는 것이다. 거듭 나는 기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