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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

어떤 책임인가?

(1) 형 카인에 의해 살해된 아벨이 보이지 않자 여호와는 카인에게 아벨의 행방을 묻는다.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여 살인에 대한 책임을 은폐하려는 의도였을까? 카인은 “제가 제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구약 창세기 4장 9절)라고 되물었다. 이러한 카인을 여호와는 크게 꾸짖고 벌을 내린다.

우리는 도움이 필요하거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 타인에 대해 책임이 있는가? 있다면 어디까지인가? 누가 나의 ‘아우’이며, ‘지키는 사람’(keeper)이란 무엇인가? 피로 맺은 부모나 형제는 지킴이가 되어야 한다는 데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범위가 점차 넓어질수록 어떤 합의를 꾀하기 어렵다. 친족, 부족, 종족, 인종, 종교, 특히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국가에 대해서는 어떤 책임을 지는가? 의무를 진다면 그 의무는 자신의 일상생활 범위에 한정된 것인가, 아니면 시공의 계약을 넘어 불특정 다수에 대한 보편적인 의무인가? 그리고 그 의무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2) 책임의 책(責)은 ‘꾸짖을 책(責)’이다. ‘꾸짖다, 요구하다, 꾸지람하다, 따져 밝히다, 규명하다, 권장하다, 해야 할 임무’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임(任)은 ‘맡길 임(任)’이다. 그래서 책임은 일을 맡기고 결과에 따라서 따진다는 것이다. 책임을 뜻하는 영어 ‘responsibility’의 어원은 라틴어 ‘respondere’(대답하다)에서 찾는다. 어떠한 요구에 대답하는 것이다. 어떠한 요구에 대답하는 것인가?

(3) 책임은 명시적 책임과 묵시적 책임이 있다고 한다. 법이나 규정에 의하여 주어진 임무와 의무는 명시적 책임의 영역이라고 한다. 명시적 책임이 어떠한 의무, 곧 법적 요구에 답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묵시적 책임은 기대에 답하는 것이다. 정치 지도자를 꿈꾸는 사람들은, 그들이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지방자치단체장이든 간에 유권자들에게 많은 기대를 심어준다. 그것은 그들의 능력이고 재주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기대에 부응하는지의 여부이다. 책임 있게 행동하는지, 아니면 기대를 저버리면서 무책임해질 수 있는지의 문제는 늘 존재한다.

훌륭한 정치의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뽑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을 지속적으로 감시하는 것이다. 그들이 과연 유권자들에게 심어준 기대치만큼 책임 있는 정치를 펼치는지, 아니면 무책임하게 권력에 맛 들어 개같이 노는지를 끊임없이 주시하고 그 책임을 따져야 한다.

누가 책임지는가?

(1) 물체와 물질은 다르다. 책상은 물체이다. 책상이라는 물체를 잘게 부수어 쪼개면 그 물체는 책상으로서의 형태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더 이상 책상이 아니다. 그러나 한 덩어리의 찰흙은 아무리 잘게 나누어도 여전히 찰흙이다. 찰흙은 물질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어를 배울 때 어려워하는 부분 중 하나가 단수, 복수, 가산명사, 물질명사와 같은 수(數) 개념이 아닐까 싶다. 우리의 언어는 수를 그다지 구분하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 사물의 수를 일일이 따지지 않는다. 그래서 너, 나가 아닌 우리다. 돈을 듬뿍 움켜주는 것이지, 쫀쫀하게 침 발라가며 세어주는 것은 군자(君子)가 아니다. 물체가 아닌 물질을 중심으로 해서 사물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서양 언어는 모든 사물을 형태로 구분할 수 있는 물체로 이해하기 때문에 단수, 복수, 셀 수 있는 가산명사, 셀 수 없는 물질 명사 등과 같은 수 개념이 발달해 있다. 사물의 개체성을 강조하고, 그를 바탕으로 집합(集合, collection)을 강조한다. 우리는 전체라는 개체성이 없는 하나의 덩어리와 같은 상태, 즉 일체(一體, one-ness)를 강조한다. 동질성, 연결성에 더 중시한다.

(2) 누구한테 책임이 있는가? 누가 책임지는가? 서양의 법사상을 익혀 제도화한 우리는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 위와 같은 사고(思考)의 차이로, 특히 책임의 소재를 따질 때 흐지부지된다.
잘못에 대한 책임 회피로 사람에 두지 않고 주위 사정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또는 책임의 소재를 ‘모두’에게 돌린다.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책임의 소재는 단수로 표시되어야 한다. 즉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 나의 책임, 그 어느 누구의 책임이어야 한다. 나의 책임, 어느 누구의 책임이 모여서 우리의 책임이 될 수 있을지언정, 처음부터 ‘우리의 책임’이란 말이 있을 수 있을까? 우리의 책임은 그럴듯하나 결국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된다.

책임원칙

(1) 오랜 세월과 많은 논쟁을 거쳐 자리를 잡았지만 범죄에 대한 형벌은 책임을 전제로 하며, 이는 형사법상 포기할 수 없는 원칙이다. 이것이 곧 책임원칙이다. 형법에서는 나의 책임이여야 하는가? 우리의 책임이여야 하는가?

기본적으로 사람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하여 범죄행위에 대하여 벌을 부과하기 때문에 옳은 행위와 그렇지 않은 행위를 스스로 선택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서는 다른 길, 다른 논리를 찾아야 했다. 예를 들어 정신장애자는 형벌을 부과하지 않거나 감경한다. 그리고 그 근거로는 사물변별능력과 의사결정능력의 정도에 따라 책임을 아예 물을 수 없다고 판단하거나 일부만 따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사물변별능력과 의사결정능력의 여부를 가지고 ‘형벌을 줄 수 있다 없다’를 이야기하기에는 실로 다양한 범죄와 범죄자가 있다. 근래에 많이 늘어나서 불안감을 주고 있는 성범죄를 놓고도 다시금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반복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전통적인 형벌부과로 인한 시설내 처우를 비롯하여 신상공개나 위치추적장치에 의한 전자감시는 더 이상 새로운 방안이 아니다. 약물치료명령이나 화학거세까지 제재 방안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나온 프리크라임(pre-crime)의 활동에 의한 사전예방체제도 그저 막연한 영화 이야기에 그칠 것 같지 않다.

책임능력이 있는가에 따라 범죄성립의 여부가 정해진다. 그래서 그에 대한 판단은 중요하다. 왈가왈부하지만, 형법에서 책임 여부는 사물변별능력과 의사결정능력의 정도를 가지고 따진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역시 말이 많다. 그러다보니 나의 책임인지, 너의 책임인지, 아니면 우리의 책임인지 이유를 그럴듯하게 갖다 붙이기에 따라 달리 이야기될 수 있다.

(2) “Simple is good.” 단순한 것이 좋더라. 사적인 인간관계에서는 ‘나의 책임’ 또는 ‘그의 책임’을 ‘우리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때에 따라서 인정머리 있는 놈으로 여기기도 하고 미덕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공적 영역에서는 막연한 ‘우리의 책임’이 아닌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나의 책임’을 따져야 한다. 따라서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것은 없다. 공적인 영역에서는… 이는 책임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책임이 없다면 형벌을 줄 수 없다. 형법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