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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오후

윤복순/윤약국 약사

완연한 가을이다. 따뜻한 햇볕이 좋고 파란 하늘이 좋다. 빨갛게 노랗게 물들어 가는 나뭇잎이 예쁘고 건조하고 맑은 공기가 좋다. 좋은 것을 좋다고 느낄 수 있는 나는 행복하다. 맛있는 것을 맛있다고 느낄 수 있고, 아름다운 가을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어서 행복한 오후 나절이다.

조금 한가한 시간 편안한 마음으로 내가 행복한 이유를 생각해 본다. 건강해서,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 살고 있어서, 남편이 있어서, 아들 딸이 있어서, 직업이 있어서, 글을 읽을 수 있어서, 말을 할 수 있어서, 춥지도 덥지도 않아서, 햇빛이 쨍 나서, 가끔씩 추억을 기억해 낼 수 있어서, 생각해 보니 모두가 행복이다.

이렇게 화창한 날엔 나가서 걸어야 한다. 양 팔을 벌리고 온 몸으로 햇빛을 맞아야 한다. 어느 해 가을날 동창이 건네고 간 머플러를 목에 감았다. 산뜻한 색상으로 멋지게 디자인한 뜨개 작품이다.

십여 년 전이다. 그 친구가 우리 약국에 들렀다. 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처음엔 서로 알아보지 못했다. 약국 봉투에서 약사 이름을 확인하고서야 어쩌면 동창일지 모르겠다 싶어 다시 왔노라고 했다. 졸업 후 처음이었다. 세월만큼이나 우리는 몸이 넓어져 있었고 또 그만큼 편안했다.

1학년 때 우리는 같은 반이었다. 가정 시간이면 언제나 내가 그 친구를 귀찮게 했다. 그 친구는 솜씨가 아주 좋았다. 특히 뜨개질은 우리 반에서 제일 잘했다. 나는 손놀림이 둔하고 눈썰미가 없어 마감 시간을 맞출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위해 기꺼이 내 작품을 끝맞쳐 주던 친구였다. 생각해 보니 여고 1학년 참 재미있었다. 우리 반은 교실이 모자라서 과학관에서 수업을 받았다. 실습실이기 때문에 한 테이블에 여섯 명씩 마주보고 앉았다. 쉬는 시간이면 수다를 떨기위해 돌아앉을 필요도 없었다.

하루는 수업 후 도서관에 갔다 오니 내 도시락이 없어졌다. 우리 테이블의 다섯 명이 모여서 가정 숙제인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나는 기지를 발휘해 도시락을 숨겼을 만한 곳을 다 찾아 보았지만 허탕이었다. 그들이 범인임을 안 나는 화가 난 척 그냥 집에 가겠다고 했다. 그때 그 친구가 도시락을 찾아준 곳은 어이없게도 흑판 위에 붙어있는 스피커 속이었다.

더욱 황당한 것은 편지사건이다. 어느 날 겉봉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편지를 그 애가 나에게 건네줬다. "웬 편지씩이나?" 하며 뜯어본 나는 기절할 뻔했다. 그 애의 사촌 오빠라고 했다. 일주일이 멀다하고 편지를 보냈다. 서너 달이 지났을까. 내가 얼굴이나 한번 보게 해 달라고 졸랐다.

처음으로 받아본 연애 편지가 이런 장난 편지일 줄이야. 다섯 친구들이 내 행동이나 표정을 관찰하며 얼마나 즐겼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꽤 심각 했을 테고. 연애 편지의 주인공이 그 친구라는 것을 알고 나는 조금 허탈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 친구의 장난끼에 질리기도 했지만 여고 1학년이 화려했던 것 같다. 그 당시 흔치않던 카메라를 그 친구가 가지고 있었다. 학교 행사 때마다 많은 사진을 찍어 주었다. 누구한테 빌려 썼을까. 선글라스를 쓰고 찍은 어설픈 사진이 지금도 남아있다.

우리는 2학년이 되면서 헤어졌다. 그 친구는 사회 반으로 나는 이과 반으로 갈라졌다. 교실도 나는 3층이고 그 애는 1층 이었다. 몸이 멀어지면서 마음도 멀어졌을까.

세월이 흘러 지천명의 중년이 되어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 친구는 우리들의 여고시절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머플러를 짜 가지고 왔다. 그때 그 솜씨 그대로였다. 머플러를 선물 받은 후 나도 뜨개질을 시작했다. 색상은 다르지만 디자인이 같은 머플러를 수십 장 만들었다. 고마운 사람에게, 예쁘다며 부러워하는 사람에게, 감기에 걸렸으면서 목은 내 놓은 멋쟁이에게, 언니에게, 동생에게, 올케에게, 시작은 어머니에게, 고모에게, 친구에게 선물했다. 지금도 나는 조용히 생각하고 싶을 때면, 말을 많이 한 날이면 뜨개질을 한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정화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머플러가 어울리는 가을이다. 친구의 정만큼이나 행복한 황금 들판을 걸었다. 고등학교 때는 가을 들판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 이런 평화와 안정을 주는 줄도 몰랐다. 나이 먹는 것이 나쁜 것만도 아니다. 세월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알게 하고 감사할 줄도 알게 해 준다.

요즘 금값이 비싸다는데 나는 오늘 하늘만큼 땅만큼 황금을 눈에 담고 왔다. 어느 화가도 그려낼 수 없는 최상의 가을 명화를 감상하고 왔다. 가을이 아니면 누릴 수 없는 호사다. 역사보다 문화보다 예술보다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이 자연임을 알게 해준 가을날 오후다. 걸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어서, 줄 수 있는 것을 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여고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친구가 만들어 준 머플러가 있어서 행복하다. 행복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서 더욱 행복한 가을 오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