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어릴 적에 비내린 뒤의 신작로를 걸어가는 새신부 이야기가 있었다. 다홍치마 끝단을 두 손으로 들어 올리고 지뢰밭 같은 물 웅덩이들을 이리저리 피해가기란 도통 쉽지가 않다. 옷매무새나 질끈 묶어 붙인 머리도 그러려니와 새신부의 거동에서 절로 배어나는 기품은 새신부가 부여받은 혹은 새신부가 지키고자 하는 정절의 향기였다.

치마 끝에 드러난 새하얀 버선발은 과도한 무게에 짓눌린 새신부의 머리와 어깨를 지탱하듯, 꽃신을 높이 들어올리지 못하고 지면과 웅덩이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이 나아간다. 넓은 웅덩이를 만나면 돌아가는 것 만이 꼿꼿한 머리와 조신한 어깨선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가까운 길도 멀 수 밖에 없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마음이 급해지기라도 하면 평정심은 깨지기 십상이다. 언제 그런 내공이 쌓였는지 새색시는 절정의 고수처럼 웅덩이 사이를 헤치고 나가되 경망스러움을 배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당위와 지켜야 하는 것 사이에서 새색시는 끊임없이 갈등한다.

그러다 주변을 둘러본다. 아무도 새색시를 볼 겨를이 없어 보인다. 길의 조건이 같으니 다른 이들도 제 갈 길에 바쁘다. 새색시는 당위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토끼처럼 껑충껑충 웅덩이를 뛰어넘어 까치발로 착지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러나 그것은 곡예와 같다. 머리와 어깨가 흔들리는 상태에서 그런식으로 착지할 때는 정확도가 담보되지 않는다.

새색시는 결국 웅덩이와 지면 사이의 물을 철퍽 밟게 되고, 하얀 버선에 흙탕물 몇 방울이 튀어 박힌다. 순백의 바탕에 흙탕물이 번지는 걸 들여다 본 순간, 새색시는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더이상 돌아가거나 조심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새색시의 행동규범을 집어삼킨다. 어차피 버린 버선발로 첨벙첨벙 웅덩이를 밟으며 곧바로 나아간다.

이러한 새색시의 고달픈 여정은, 최근 안철수의 행보와 그가 처한 지형을 떠올리게 했다. 그 기억의 결정적인 방아쇠는. 한국방송 앵커 출신 류근찬 전 국회의원이 안철수를 향해 퍼지른 '두번, 세번 시집갔다 과수가 된 걸레'라는 막말이었다.

그는 지난 11일 자신의 트위터에 "안철수는 시집 안 간 처녀 땐 신선해 보였다"며 "그러나 걸레가 되어버린 지금 누구와 결혼한들 무슨 관심 있고 정체성이 확실하겠나. 불안한 출발은 당연하다"고 비아냥댔다. 나아가, '헌철수한테 올 새 인물이 어디에 있겠나' '걸레들의 행진'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고 비난했다.

류근찬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안철수의 '새정치'는 실체가 없다는 걸 오래전에 확인했다. 그래서 잡고 있던 손을 놔버렸다"며 과포장돼 허명뿐인 안철수가 이젠 커밍아웃을 할 차례라고 적었다.

이같은 막말의 논거는 나름 있어 보인다. 안철수는 지난번 대선 때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문재인에게 진 뒤 민주당을 박차고 나가 미국에서 한동안 은둔했다. 오랜 침묵 끝에 귀국해서는 신당을 창당했고, 민주당과 합당해 자신의 지표인 '새정치'를 당명에 반영하는 등 여전히 살아있는 대선주자로서의 지분을 확보했다.

하지만 지난 지방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이 참패했다. 또, 새누리당이 의제가 발생할 때마다 대통령에게 휘둘렸고, 정권은 민주주의를 역주행했지만 새정치민주연합이 이를 전혀 견제하지 못하고 제 몫을 수행하지 못하면서 '무능 정당'으로 전락하자 안철수는 또다시 탈당을 선택했다. 안철수는 지금 '국민의당' 창당을 준비하고 있다.

안철수의 목표는 대통령이다. "생각이 달라도 목표가 같으면 함께 하는 것"이라고 그가 연대 기준을 밝히는 배경이다. 그는 뺄셈 정치가 아닌 덧셈 정치를 하되 부정부패와 수구보수에 선 사람, 이분법적 사고를 가진 사람은 배제하는 3대원칙을 강조한다.

그가 대통령이 되려면 국민의당이 원내교섭단체를 충족하는 국회의원들을 확보해서 그를 대선 후보로 추천해야 한다. 급하다.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서두르던 그는 새정연 탈당 초입에서 3대 배제원칙에 걸리는 사람들을 영입하려다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지난 10일 창당준비위원회 발족식은 고작 더민주당 탈당파 의원들 몇이 주축을 이뤘다.

목표에의 조급증을 백안시하는 '걸레'의 눈

안철수가 비판받아야 할 지점은 바로 조급증일 것이다. 그것은 신중하기 어려운 증상이고, 목표에 집착한 나머지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태에 떨어지게 한다. 그것이 안철수로 하여금 더민주당을 들락거리게 하고, 그로인해 계파갈등 타파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고, 더민주당 비주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입지의 근원이다.

그럴 바에야 새정연에 남아서 공천심사위원장이 되어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인물들을 공천하는 것이 백배 나았을 것이다. 그것은 안철수의 '새정치'가 구체성을 획득하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지금의 지형이 그보다 나은 점이 무엇 하나 있는가. 안철수의 정체성 상실과 구태의 답습은 모두 조급증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안철수가 시집 안간 처녀였을 때 신선해 보였다는 류근찬의 시선은 차마 따라가기 민망하다. 그것은 처녀 아닌 여자는 신선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고, 남성인 안철수를 비하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처녀'라는 여성성을 대명사로 삼았다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류근찬의 '결혼 경험=걸레'라는 등식은 이 땅의 모든 결혼 남녀가 걸레라는 뜻인데, 그런 맥락에서 류근찬 자신 역시 빨아도 걸레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을 법하다. 그 자신 걸레가 걸레를 백안시하는 개그라니! 포인트를 찾지 못하던 국민들이 한참 뒤에야 그의 살신성인 개그를 알아채고 박장대소하겠다.

하지만 뒷끝이 짠하다. 걸레의 말이 신선할 턱도 없거니와, 격한 웃음 사이에서도 자력에 끌리듯 '처녀'의 사전적 의미(결혼하지 않은 성숙한 여자로 아직 이성과의 성경험이 없는 상태)가 떠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결혼 전에는 여성을 모르는 숙맥이었으리라. 순결=신선이니까.

굳이 류근찬의 어법을 따른다 해도 안철수에게 사회적으로 비난 받을 흠은 없어 보인다. 적어도 배우자 한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했으니까. 류근찬의 치명적인 오류는 결혼을 '생애주기의 변화나 한 단계 더 높은 성장'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걸레로 전락하는 것'으로 본 점이다.

그의 순결에의 도착증은 인류가 번식을 중단하고 '신선'을 만끽하다가 멸종되자는 것인가. 아무래도 걸레들의 행진은 마뜩잖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