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빠른 시대다. 그 선두에는 독창성이 있다. 첨단 기기들은 더 뾰족한 첨단의 지형을 주도하고, 새로운 정보는 단 하루도 새로운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세상이다. 과학기술을 비롯한 의술, 학술, 전술, 예술 등 모든 지식분야는 매순간 생존을 위해 진화하고 진화를 위해 생존한다.

무한경쟁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분투의 산물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폐기처분되고, 그 살풍경은 생존본능을 자극한다. 공동체의 파편화에 가속이 붙고, '자신만의 무엇'과 '공감'사이의 함수관계가 생존값을 결정하는 메커니즘이 다양성의 스펙트럼을 확장하고 있다.

전체적 개인 혹은 개인적인 전체는, 과거와 다른 모습이었을 때 혹은 과거가 낳은 결과물일 때 존재를 확인하는 시대인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찍어내는 질서 속에서 그 지속기간은 짧다. 어쩌면 이 불확실한 시대의 문화는 과거에 기댄 진보적 상상력의 틀이며, 장렬한 하루살이들의 생존 틀이다.

지속가능성을 모색하는 인류가 정작 내일이 없는 생존 방식에 휩쓸려버린지 오래되었다. 각각의 종들이 첨단의 극지점에서 또다른 내일을 찾기란 어렵고도 위태하다. 인류는 그런 불안한 지형을 벗어나기 위해 '개별화'의 극단에서 '융화' 쪽으로 선회를 감행한 지 꽤 되었다.

서로 다른 것들 끼리의 교집합 영역으로 첨단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각 종의 문화는 '접합'으로 새로운 문화의 생성 확률을 높였으며, 그렇게 창출된 문화들은 장벽을 무너뜨리고 개별적인 것들을 연결하는 길이 된다. 이 지점은 탈근대화가 치달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극단이다.

그 혼종의 문화들은 신인류를 낳았다. 유목민이 그들이다. 길과 길 위에서 온갖 문화를 탐닉하며 잔뼈가 굵은 그들은 끊임없이 혼종문화의 창출을 주도하거나 매개한다. 그들이 영역을 넘나들 때마다 문화와 문화는 융합되며 그렇게 생성된 문화는 또 유목민들의 새로운 목초지가 된다.

소비자이자 동시에 생산자인 유목민들은 언어와 인습을 초월한다. '따로따로'이지만 언제나 '같이'를 추구한다. 공존 불가능한 이항대립에서 풀려나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메신저들이다. 정착민들은 유목민들의 다른 삶의 가치관을 경계하고 배제하지만, 진화를 위한 유목민들의 융합 전략은 결국 경계를 무너뜨리고 정착민들의 변화를 촉발하고야 만다.

고정된 사회, 획일적인 사회, 중심이 상정된 사회에서 중심과 감시로부터 벗어나려는 끈질긴 저항정신이 공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독립성을 구현한 그들은 합리성이나 기능주의와 결별하고 이성, 과학, 진보의 가치보다는 상상계, 쾌락, 축제 등과 관련한 가치를 더 중시한다.

유목민들은 하루를 영원으로 사는 존재들이며, 내일이 없는 오늘 속에서 내일을 사는 인류다. 그들의 오늘은 낡은 어제의 가치들을 녹여서 내일을 찍어내고 내일이 오기 전에 내일을 소비하는 초인들이다. 그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지구의 자전운동 역학을 벗어나 분·초단위 안에서 명멸한다.

모든 길 위의 장애를 뛰어넘는 그들은 폭발적인 에너지를 자랑한다. 지구촌 전역을 바람처럼 휩쓸며 전류처럼 통한다. 모든 생명현상과 거기에서 비롯하는 모든 문화에 개입할 수 있는 이유다. 그들은 이것과 저것의 병립을 주도하지만, 머물면서 지배하지 않으며, 다른 것들을 같은 것으로 그래서 새로운 것으로의 전이를 매개한다.

그들의 정체성은 현재의 나에 의해서가 이니라, 앞으로 내가 될 어떤 것에 의해서 결정된다. 아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추구하는 것에 의해서 결정된다. 가진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족한 것, 욕망하는 것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래서 공간을 소유할 필요가 없는 그들은, 각자가 동류의 감정을 공유하면서 미리 주어진 시간을 거부하고 즉흥적으로 만든 시간을 누린다. 그것은 불안정한 방랑의 리듬에 적응하는 태도이며, 오히려 매 순간 실존적 삶을 인식하는 방법이다.

물질적 풍요는 이동을 방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의 유전자에는 생각과 경험, 지식이나 관계의 축적에 따른 '연대'와 '관용'의 지표가 새겨진다. 그것은 도그마적인 질서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선천성이다.

그들은 복합적이고 다양한 문화에 충돌하지 않고 물처럼 섞이지만, 계승이 아닌 창조를 주도하는 정체성으로 '순간'이 행복한 공존의 이상향을 지향한다. 첨단 이동장비를 갖춘 유목민들은, 정서적, 직업적, 이데올로기적 안정을 추구하면서도, 다양한 문화에 섞일 수 있으며, 동시에 여러 부족에 소속될 권리를 획득한다.

그들과 혹은 나의 내부에 관심이 끌릴 때, 마페졸리가 규정한 유목민들의 특질이 맑은 눈이 되어 줄 법도 하다. 그것은 광란성에서 기인하는 사교성이다. 뜻밖에도 광란성은 정착민의 잠재성을 이끌어내는 길라잡이이며, 사교성은 관계의 온갖 변수에 빠르고 정확하게 대응하는 유연성이다.

유목민은 태생적으로 도시를 위험에 빠뜨린다. 방랑 자체가 불안을 초래하는 탓이다. 불안은 필연적으로 다양한 정체성들을 초래하는 역설을 지녔다. 격렬하게 기뻐하고 강렬하게 고통을 감당하며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지혜는 불안정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집단적 흥분이나 관능의 우월성이 유목사회의 세계관인 이유다. 열정의 세계, 이성의 세계, 경직된 질서를 뛰어넘는 세계, 역동성 속에 통합될 수 있는 무질서의 세계, 생명유지를 위한 생산을 거부하는 불확실성의 세계를 그들은 꿈꾼다. 그들이 서로 다른 것들간의 융합을 꾀하는 방식, 혹은 삶의 양태가 도취, 무절제, 매음, 방탕일 수 밖에 없는 한계의 근원이다.

지배적이었던 가치가 소멸하고 또 소멸했던 가치가 다시 지배적이 되는 자리바꿈의 끝없는 순환은 한 가치의 효력이 정점에 달했을 때 그와 동시에 그 효력이 소멸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유목민들을 통해서 발견한다. 그들의 광란성이 지배적인 하나의 가치를 거부하는 극지점에서 결국 그들이 정착민들을 부정하는 상황에 우리는 이르렀다.

기생존재가 숙주를 부정한다면 그 끝은 불보듯 뻔하다. 하이데거는 일찍이 원초적 조건에서 기인하는 불안을 경험하는 존재들, 육체적 혼합과 육체의 혼돈이 망각의 시간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믿는 사람들의 출현을 예고했다. 그들에 의에 인류는 혼돈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고 있다.

한 쪽 끝에서 창조된 것을 다른 한쪽에서 먹어치우는 신적인 힘, 그것은 곧 키스 안셀이 설파하는 바와 같이 차라투스트라가 보여주는 지하세계이다. 그들은 안정적인 질서, 제도를 파괴하도록 운명지어진 강한 남성성이다.

광란성은 한계에 봉착하는 필연의 길 위에 있고

덜 떨어진 정치는 숙주를 부정하는 기생에 동조

인류는 그들에게 위협받고 있지만, 그들이 순식간에 절대다수가 될 수 있는 여지도 많다. 현대 도시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실존적 상호소통을 열망하며, 마페졸리가 입증에 천착해왔다시피 누구에게든지 길들여지거나 반쯤은 받아들여진 방탕함이 있고, 그것이 집요하게 일상의 삶의 조직화 속에서 계속 우세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내부의 광란성이나 방랑벽은 잠재된 가능성과 창조성을 끊임없이 발견하게 해 주는 도전의 동력이며, 모든 경계를 횡단하면서 자신의 가치 실현을 이루고 기계적인 일상과 사물의 비루함을 넘어서게 한다. 그러나 그 남성성은 동시에 타락과 파멸을 부르는 파괴성이다.

유목민발 불안의 근원은 왜곡된 자기애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존재의 침몰 또는 윤리의 몰락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 남성적 질서의 강고함은 여성성의 세계를 위태롭게 한다. 그것은 생명을 잠식하는 기제들이다.

역설적이게도 고삐풀린 남성성은 오직 여성성만이 잠재울 수 있다. 은근과 끈기로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여성성의 부활이 절박해진 시대다. 정착하면서 먼 곳에까지 자기를 빛내고, 느리지만 풍요로운, 내일을 약속하는, 그 토대 위에서 절대적으로 상호의존하는, 역동적으로 변화하면서도 오래된 가치를 중시하는, 일상생활 속에서 진정한 문화가 숨쉬는 그 여성성의 세계.

대한민국 여성친화도시 1호 익산이 자랑스러웠던 이유다. 수많은 도시들이 벤치마킹하고 그 가치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공유될 때 가슴이 뛰고 뿌듯했던 이유다. 남성성의 포화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장차 세계속의 익산이 되리라는 근거 명백한 기대에 벅찼던 이유다.

그러나 문화(여성친화도시)의 기획과 창출단계에서 겪었던 모진 산고는 짧은 기간 동안에 사라져 버렸고, 이제 막 걷기 시작했던 여성친화도시는 성장을 멈췄다. 일그러진 정치인의 광란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고, 차갑고 어두운 동굴 속에 갇힌 채 위축되었다.

천년만에 싹을 틔운 문화조차도, 그 가능성과 필연성 그리고 확장성을 묵살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덜떨어진 정치가 목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가치는 가치를 아는 자만이 얻을 수 있고 지킬 수 있다. 우리에게 가치를 추구하는 여성성이 절박한 오늘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