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정치란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질서를 만들고 그것을 유지해 나가는 일이다. 그 질서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절대다수 대중의 상식이며, 그 유지는 상생과 공존을 지향하는 합목적성에 기반한다.' 이는 오늘날 정치의 방향성을 집약하는 총론이다.

위정자가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민감할 것을 요구받는 까닭이다. 위정자는 오직 생존의 파수꾼이며, 불안에 맞서는 전사다. 민주주의 사회의 위정자는 주권자의 뜻을 대신 발현하는 대표 자격으로 정치를 행하되, 언제나 주권자를 두려워하고 주권자에 충성을 다하는 공복이다.

위정자의 주권자에 대한 헌신과 희생의 정도는 한 나라 정치의 수준을 결정하는 척도다. 위정자의 수준은 결국 유권자들의 수준을 반영한다. 정약용 선생이 목민심서에서 백성들에게 침묵은 죄라고 설파한 이유다. 그는 "백성이 옳지 않은 일에 가만히 있으면 목민관이 지혜롭지 못하고 옳지 않은 일을 계속한다"고 했다.

2015년 8월 대명천지에 온 나라는 북풍 데자뷰의 혼란에 빠졌고, 이 나라 정부는 휴전선의 긴장상태를 전장의 위기감으로 비화시켜 국민들의 불안심리를 극단으로 몰아붙였다. 그 끝에서 극적인 타협이 이루어졌고, 뜻밖의 남북대화 결과까지 도출됐다.

남쪽 철책 통로에 목함지뢰를 매설한 도발을 사과하지 않으면 대북 확성기 방송을 계속하겠다던 호언과 그 실행은 남북 준전시태세 돌입의 진원이었는데, 사과도 받지 않고 대북 확성기 방송을 중단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북한의 유감표명이 곧 사과라고 한다.

유감표명을 풀어서 말하자면 "어찌된 일인지 모르는 일이지만 당신네 철책에서 목함지뢰가 폭발해 장병들이 다친 것은 유감으로 생각한다" 정도인데 말이다. 그런데 국민들은 또 관대하다. 북한과 우리 정부의 입장을 서둘러 이해하려고 한다. 국민들에게는 우선, 북한은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함으로써 상황에 대한 통제권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다는 선험적 이해가 있다.

우리 정부는 안보 불안의 장기화가 부를 국가 경제·사회의 막대한 피해를 막기 위해 맹목적으로 작동했을 것이라는 이해도 있다. 국민들은 극한의 긴장상태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사실, 남북이 전쟁놀이를 중단한 것만으로도 안도하는 게 국민들의 정서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그 긴박한 상황의 고위급 접촉에서 남북 당국 회담 개최와 이산가족 상봉, 그것을 위한 적십자 실무 접촉, 민간교류 활성화 같은 합의 결과까지 뜻 밖의 선물을 내밀었다. 대통령과 집권여당의 지지율이 치솟을 수 밖에 없다.

이런 극도의 긴장 고조와 협상 그리고 표피적인 남북관계 진전은 제헌 이래 수차례 거듭된 데칼코마니이지만, 그것을 의심하거나 말하려는 사람은 드물다. 본능적으로 일단 벗어나고 싶은 공포상태와 이를 해소한 타이밍이 절묘했고, 국민들은 더 바랄 것이 없다.

나아가 우리 정부는 파수꾼이나 전사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고, 위정자는 자랑스러운 대표이기 때문이다. 이보다 훌륭한 정치가 어디 있겠는가. 군복무 중에 휴전선에서 발목을 절단당한 장병들은 빨리 잊어버리고 싶다는 듯 국민들은 더 이상 말이 없다.

현실 속에서 분단의 현실을 극명하게 깨우쳐주는 '국방의 의무'와 무관하지 않은 모든 국민들이 침묵한다. 그것은 충격의 크기와 압박의 무게가 이끌어 낸 반작용일 것이다. 얼마나 놀랬으면 내 자식과 형제가 발목을 잃은 것을 재론할 엄두를 못내겠는가.

'사과'라는 것은 사과하는 쪽이 먼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 성립한다. 구체적으로 책임질 것을 짚고 거기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이 사과다. 더구나 지뢰 도발은 남북 양쪽이 전쟁도 불사하겠다며 덤볐던 사안이다. 북쪽의 사과에 개선의 의지와 보상 책임 이행 약속이 함께 담겨야 하는 이유다.

양쪽 고위 당국자들이나 국민 모두가 아는 사안이다. 그런데 북쪽은 제3자의 표현을 빌어 '유감'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도 격분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정치적 사건에서도 수동태적인 사과 표명은 반발을 산다. 잘못을 저지른 존재는 인정하되 책임이나 자신과의 연관성은 부정하고 거부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4일 동안 무박으로 협상의 줄다리기를 한 고위 당국자들의 노고를 칭송할 따름이며 어떤 책임도 추궁하지 않는다.

불안을 전가의 보도로 휘두르고

냉전의 이분법에 주객은 전도되고

우리 정부의 기세로 보았을 때, 지뢰 도발은 협상 대상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정전협정과 남북간 불가침 합의를 정면으로 위반한 도발인데, 책임있는 조치가 이루어질 때까지 북한에 압력을 가해야 온당했다. 더구나 북쪽은 남쪽의 확성기 방송조차 참아내지 못하고 흥분하며 남쪽에 포격까지 감행했다.

남쪽이 북쪽에서 받아야 할 사과는 협상의 결과물이 아닌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협상을 통해 중간 어느 지점에서 만나는 관계가 아니다. 따라서 가해자가 사과를 할 때는 피해자와 같은 곳에서 출발해야 한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당연히 원상복구의 책임까지 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는다. 6.25 동란의 참상이 아직도 생생한 탓이다. 상실만 낳고 패배자들만 낳는 비극을 몸소 겪었으며, 아직도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대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를 공동체의 절대명령으로 받든다.

위정자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다. 휴전 이래 수십년 동안 전쟁을 겪은 분단국가 국민의 심리를 누누이 확인해 왔다. 위정자들은 공산·민주, 남·북, 좌·우 같은 알기 쉬운 이분법으로 냉전을 고착화 시켰으며, 국민들의 근원적인 공포가 그것을 도왔다.

이 나라가 급진적이고 다원화된 문화를 전방위적으로 수용, 재생산하면서도 근대의 질서인 '흑백논리'에 여전히 갇혀있는 까닭이다.

남북 전쟁이 터지면 가장 먼저 김정일이 사망하게 되어있는 전략 무기의 존재와 정보 시스템이 공유되지 않으며, 북쪽에서 비무장지대를 가로질러와 남쪽 수색로 철책에 지뢰를 매설할 경우 반드시 열감시장치에 걸리도록 되어있는 경계 시스템의 존재가 공유되지 않는 미개한 나라일 수밖에 없다.

65년 전의 시공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독재시대의 망령에 사로잡힌 위선자의 나라. 국민이 위선자를 두려워하고, 국민이 위선자에 충성하는 나라.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언제나 반복되어도 되는 전체주의의 나라. 위선자가 국민을 속이고, 그것을 아는 국민이 침묵하는 온통 지뢰밭 천지의 나라. 그런 나라는 전근대적인 위선자와 국민들이 연출한다.

그렇다. 이 나라에 정치는 없다. 독선과 독단으로 전횡을 일삼다가 자초한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불안을 전가의 보도로 휘두르는 위선과 협잡이 있을 뿐이다. 국민은 그 아래 납작 업드려 침묵하는 주객의 전도가 있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