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책임지는 어른이 없는 사회다. 규범과 가치를 중히 여기며 우리 삶을 잡아주고 모범을 보여 줄 스승이 없는 사회다. 학생들이 비정한 경쟁에 희생되고 노동자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스러져 가지만, 4.19 혁명은 빛바랜 흑백사진 속의 한 장면에 머무는 원인이다. 51년 전 그날, 우리의 스승들은 비상계엄의 총뿌리 앞에서도 당당했다. 독재에 항거하다 경무대 앞에서 희생된 젊은 피의 댓가를 헛되게 하지 않겠다는 책임있는 어른들의 행동이었다. 민초들은 기꺼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새천년 이래 스승들의 시국선언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존재감도 확보하지 못하는 미풍에 그쳤다. 그들의 일상이  인권이나 자유가 차별적으로 부여된다는 듯한 태도를 취해 온 결과다. 불평등을 인식하는 당사자들이 직접 투쟁해서 쟁취하는 것일 뿐, 그 결핍을 함께하지 않는 국외자의 전형이 곧 오늘 우리들의 스승이다. 모든 사회적 연대를 회피하는 냉소적인, 혹은 연대를 꾀하더라도 정치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는 그들이다.

그들은 사익에 경도된 세태를 비판하지 않는다. 목적 달성에 비합법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행태들에 대해서도 함구한다. 그들에게 대의, 이념, 가치는 책 안의 담론일 뿐이며, 그것을 실현하는 주체로서의 책임은 관심 밖의 일이다. 신념을 추구하고 실현하며 그 결과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과 책임지는 자세의 실종, 도덕적 기준과 일관성·의무감의 부재(不在), 그런 우리의 현주소는 고립감과 목표상실증을 동반한다.

비행이나 범죄 또는 자살같은 예측할 수 없는 사회적 행동들은 무관심에 따른 소외감에서 기인한다. 우리사회가 직면한 아노미(행위를 규제하는 공통 가치나 도덕 기준이 없는 혼돈 상태. 개인의 분리감, 고립감이 위험수위에 이른 상태)는 관계의 결핍이 만연한 결과다. 우리의 어른들이 젊은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배척하는 사이에 도달한 곳이다. 젊은이는 부도덕한 지도자를 뽑은 자신이 타락한 인간이라고 자책하지만, 우리의 어른들은 양심과 상관없이 유능한 사람을 뽑았다고 자위한다.

우리의 어른들은 물질적 풍요(실리)보다 의미(명분)의 부재가 더 큰 문제라는 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시장(市場)에서 '의미'는 '풍요'의 부산물이라는 집단규범에서 한치도 물러서려 하지않는다. 자신이 가르친 것을 이상으로 치부하고, 그것은 교과서 안에서만 존재한다고 믿는 그들만의 별에서 내리려 하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올바른 삶의 모범을 보여줄 지도자를 찾고 그를 따르면서 삶의 방향을 정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어른들의 시장에서는 덕(德)은 늘 '능력'의 부가적 조건일 뿐이고, 간혹 덕은 능력을 저하시키는 부정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어른들은 더이상 자신들이 의지할 만한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확신을 갖게 된 젊은이들이 당도한 곳, 거기에는 무기력, 목적의식의 결여, 감정의 공허, 절망 같은 불안정한 심리적 기제들이 뒤섞여 있다. 연예인들을 비롯한 학생, 노동자들의 잇단 자살은 자아의 타자에 대한 소외에서 기인한다. 이는 법적 도덕적 아노미 현상을 심화시켜, 자신과 주변을 폭로하는 사회적 자살을 양산한다. 한 사회 내의 도덕적 가치관의 붕괴, 그것을 도저히 복원할 수 없을 때 발생하는 현상이다.

시장(市場)의 가치를 쫓으며 개인을 말살하는 사회 앞에 벌거 벗은 신정아. 그녀는 과거 돈독하게 우정을 쌓았던 언론과 지인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고 자기의 도덕적 기반을 상실했다. 그녀가 집필한 '4001'은 성(性)을 둘러싼 부도덕을 말하기 위해 규범을 버렸으며, 분열적 충동을 그대로 드러냈다. 자신의 직접적이고 사적인 관계의 틀이 더이상 예측성이 없고 자신을 지지해 주지 않는다는 인지의 결과물이다. 뒤집어보면 그녀의 입길에 오른 정계, 학계, 언론계 인사들은 사회적 결속력에 관한 개인의 의식이 분쇄되는데 가담했거나 방관한 자들이다.

스폰서 검사 명단과 내역을 폭로하며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부정한 정용재. 그는 검찰이 얼버무려 사실상 종결된 사건의 피의자(검사) 100명의 행태가 담긴 책을 지난15일 출간했다. '검사와 스폰서, 묻어버린 진실'에는 그가 성을 접대한 검사 56명의 실명과 규칙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촌지를 상납받아 온 군상들이 소개됐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그가 말하려는 검사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정당한 방법을 갖고 있지 않다. 정용재와 검사들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효율성만을 강조했으며, 목표달성을 위해서는 비합법적 수단도 가리지 않은 결과다.

시장(市場)에서는 신정아가 지극히 은밀한 것을 상품화 해서 적잖은 재화를 획득했다고 평가하며, 정용재가 책을 출간하는 것 역시 그 결과를 의도한 행위인 것으로 단정했다. 이는 시장의 방어기제다. 자신의 시스템에 상처를 입지 않기위해 스스로 작동시킨 완충작용이며, 신정아와 정용재의 폭발력은 약화되어 직접적인 관계자들에게 충격을 주는데 그칠 것이다. 그들 가해자들은 내출혈을 감수하며 침묵과 무표정으로 시장의 보호막 안에서 은신 할 것이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신정아와 정용재의 폭로는 모호한 진위의 경계선상에서 일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자들의 한낱 신변잡기로 전락하여 확산력을 잃고 폐기처분 될 것이며, 신정아와 정용재가 관련된 시장의 문제는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사람은 수단 아닌 목적 돼야

이렇게 시장은 본질에 대한 침묵과 외면으로 지속가능성을 확보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배출되는 왜곡의 누적은 피할 길이 없다. 시장이야 말로 불안(아노미)을 양산하는 주체다. 우리의 스승들이 집단적 가해자 편에 더이상 서있지 말아야 할 이유다. 시장의 폐해에 저항하지 않는 젊은이들을 일깨우고 '非시장적 가치'를 주장하는 젊은이들과 연대하는 스승이 절실하다.

갈등과 불신은 사람을 이익창출의 수단으로 삼는데서 비롯한다. 이는 목적을 배제하면 유지되기 어려운 관계를 형성한다. 계약관계에 있다 하더라도 배신이 난무하며 별안간 관계의 단절이 찾아든다. 사람이 목적이 되는 공동체 유대와 미덕의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분리감과 고립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협력과 신뢰는 행복한 관계와 사회를 합의해 내는 기제다. 젊은이와 스승이 공동선을 함께 고민하고 판단하며, 시민 자치에 참여하고 공동체 전체의 운명을  결정 짓는 책무를 이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