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칼럼 > 472호 선거제도 개혁, 백지상태에서 다시 시작해야

472호 선거제도 개혁, 백지상태에서 다시 시작해야

편집국장 공인배

야 3당이 선거제도 개혁에 내년 정부 예산안을 볼모로 삼게 한 배경이다. 하지만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선거제도 개혁의 최상수는 아니다. 당장에 지금의 국회가 확보하고 있는 신뢰로는 '의원정수 고정' 위에 서 있는 국민을 한 치도 옮길 수 없다.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 정의당 등 야 3당이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연내 관철'에 사활을 걸었으나 불발에 그쳤다. 12월 9일이 정기국회 회기 만료일인데 예산안 법정 처리시한인 2일을 넘기고 3일부터 철야 농성에 들어갔다. 선거제도 개혁안과 내년도 예산안을 동시에 처리하자는 요구였다.

그런데 민주당과 한국당은 6일 야 3당을 배제한 채 내년도 예산안에서 5조원 규모를 감액하는 조건으로 합의한 내용을 발표한 뒤 7일 본회의를 열어 내년도 예산안을 전격 처리했다. 정국은 급랭되었다. 회의록 한 자도 남지 않는 양당의 볼썽사나운 짬짜미 예산안 처리는 스스로를 '기득권 동맹'의 프레임에 가뒀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당초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약속했던 것이고, 휴지조각이 되고 있는 국민들의 정당 지지표를 살리기 위한 선거제도 개편 논의가 무르익었다는 점에서 야 3당의 농성은 나름의 명분을 획득했었다.

하지만 야 3당이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대안 가운데 가장 합리적이고 흠결이 없는 대안이냐'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면, 야 3당이 서 있는 곳은 살얼음판일 수밖에 없었다. 당장, 민주평화당·정의당 등의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해 의원정수를 60명은 더 늘려야 한다"는 주장은 국민의 정서에도 반한다.

개혁 논의를 촉발하기 위한 것이라며 정개특위가 최근에 제시한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혁 방안' 3가지 안에서도 2개는 ‘정수 유지’이고 1개만 ‘정수 확대’안인데 그것도 30명을 늘리는 데 그치는 안이다.

그렇더라도 야 3당의 의원정수 확대 논리가 아주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경제개발협력기구 평균 국회의원 1인당 인구수가 9만 7,000명인 것을 감안하면 17만명인 우리나라 국회의원의 대표성이 크게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제헌국회 이래 그동안 수차례의 선거제도 개편이 있었지만, 현장에서 대표성과 관련한 의원정수 문제가 제기된 바가 없다.

'국회의원 숫자가 아니라 국회의 질이 중요하다'는 말에도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작금 야 3당의 의원정수 확대 주장은 국회의원의 질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정당의 이기에서 비롯했다. 만약 특정 정당이 "우리 당 의원의 질이 다른 당 의원의 질보다 높으니 우리당 의석을 늘리기 위해 의원정수를 확대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정치가 아니라 싸우자는 것이다.

무엇보다 현재 국회의원 수가 부족해 국회가 행정부를 제대로 감시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은 없다.

야 3당이 농성의 빌미로 삼은 것도 결국 민주당 이해찬 대표의 "의원정수를 늘리는 것은 안된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현재 범위 내에서 하자는 것이다"는 말이다. 그는 당대표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의원정수 반대 입장의 근거로 '국민 여론'을 들었다.

그는 여론조사를 하면 국민들이 의원정수를 늘리는 데 대해 거의 압도적으로 반대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정치란게 그런 국민 의사를 무시해서는 안 되고 그런 국민 정서를 뚫고서 선거제도 개혁을 강행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런 맥락에서 오히려 '의원정수를 적어도 10%는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유한국당 비대위가 국민 정서에 가깝다. 지난해 김학용 한국당 의원이 의원정수를 현재 300명에서 200명으로 줄이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점을 감안하면, 자유한국당은 선거제도 개혁과 관련해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과 이해찬 대표에게 국회파행 책임이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는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015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권고한 이후 여야 5당과 함께 그 시행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공약에 포함시켰으며, 이는 이후 쭉 민주당의 당론이었다.

심지어 문 대통령은 지난 3월 대통령 발의 헌법개정안에도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포함시켰다. 국회에서 선거법만 고쳐도 가능한 일이지만, 국회논의가 지지부진하니까 아예 헌법에 집어넣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이해찬 대표도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놓고 "우리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가야 될 길"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의원정수를 늘릴 수 없으니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불가하다"며 입장을 바꿨다. 그러면서 '우리 당의 당론은 권역별이었지, 연동형이 아니었다'다고 해명하고 있으나 당론을 뒤집는 말 바꾸기일 뿐이다.

대통령을 포함한 민주당의 행태는 선거제 개혁 논의와 관련한 불성실과 무소신의 표상이다. 연동형 비례제 개념은 단순하다. 정당득표율대로 각 정당에 먼저 의석을 배분하고, 정당들이 획득한 지역구 의석수가 모자라면 비례대표로 채워주는 방식이다. 의원정수 확대는 불가피하다.

그런데 민주당은 지금에 와서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의원정수' 확대를 동반하는지를 몰랐었다고 자인하는 꼴인 것이다. 이는 시대적 요구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검증도 하지 않은 채 인기에 영합하며 조변석개하는 정당의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심상정 위원장(정의당)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제시한 국회의원 정수를 300명으로 그대로 두고 지역구·비례대표 비율을 2:1로 하자는 방안을 거부했다. 선관위의 방안에 따를 경우 지금 정의당이 주장하는 비례대표 의석을 확보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이 지역 비례대표제는 지역구 의석을 현재 253석에서 150석으로 줄이는 것을 전제하는데, 심 위원장은 국가살림에 이로운 이 방안을 수용하지 않으면서 국가살림에 해로운 '비례대표를 늘리기 위해 의원정수를 확대해야 한다'는 정당 이기주의 혹은 현역의원 집단이기주의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불신을 먼저 털어내야

일어설 수 있다

이런 행태를 목도하고 있는 국민들의 귀에는 '국회의원 1인이 대표하는 국민이 너무 많다'' 밥값 잘하는 국회의원 늘리자' '욕먹더라도 의원정수를 늘리자'는 말들이 궤변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선거제도 개편의 핵심은 '비례성' 강화와 '다당제' 보장이다. 결국 '공정한 대표성'과 '협력의 정치'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두 가지 목표를 다 얻으면서 단점을 최소화하는 제도를 선택해야 한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정치는 하고 싶지만 선거는 싫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제도라는 비판 앞에서 떳떳할 수 없다. 인물로 평가받는 게 아니라 정당 득표율로 의석을 배분하기 때문이다.

15년 전 노무현 전 대통령도 '정치개혁 입법과 관련한 대국회 서신'을 통해 "권역별 비례대표제가 지역구도 타파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비례대표 의석수를 지역구의 50% 수준으로 대폭 확대해야 한다"고 했다.

현행 정당별 득표율과 총 의석 배분비율이 일치하지 않는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를 바꾸고 지역적 기반이 있는 거대 양당 외의 3당이 들어설 공간을 만들기 위한 선거제도 개혁 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선거구 획정 시일은 내년 4월이다. 시간이 많지 않다. 거대 양당에 주장을 묵살당한 야 3당의 반발이 극단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여러모로 부적절하다. 민주당은 당론을 하루아침에 갈아엎을 수도 없다.

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의 예산안 합의를 두고 '기득권 동맹'이라고 몰아붙이는 야 3당의 예봉을 상쇄시킬만한 대안이 도출되어야 한다. 의원정수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정당별 득표수와 총 의석 배분비율이 완벽히 일치하는 제도를 모색해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정쟁에서 벗어나 여야와 시민사회의 전격적이고도 심도 있는 논의가 요구된다.

야 3당의 요구를 충족하고 거대 양당이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대안은 현행 의원정수 안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문제는 선거제도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여야의 진정한 태도와, 대의명분 아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백지상태에서 시작하는 자세,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고민과 결단이 수반되었을 때 여야가 접점을 도출할 수 있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