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풍요는 희생과 끊임없는 도전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이 타고난 성심에서 기인한다.

도로 위에 있는 생물을 단박에 말리던 화마는 언제 떠났을까. 꼭 필요한 때 말고는 도로를 벗어나 한사코 그늘로 숨는 관성에 익숙한데, 문득 우러러 본 하늘은 언제 광포한 불볕을 풀어놓은 적이 있었느냐는 듯 말갛게 내려다 본다.

열에 들떴던 내 이마는 그 하늘과 땅 사이의 소슬한 바람에 식고, 불안과 초조에 생성되어 가슴속에 가득찼던 생존의 독기는 감은 눈 아래에서 연기처럼 흩어진다. 가을은 그렇게 와 있었다. 깊은 숲 속과 너른 들이 부지불식간에 가을에 물들어 있었다.

익어가면서 저리 아름다운 건 모진 비바람과 폭염을 견뎌낸 이의 미소가 아닐까 한다. 익어 마지막을 앞둔 몸들이 저리 싱그러운 것은 그 몸안에 새로운 내일을 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연유로 가을은 갈무리의 계절, 다한 생명이 씨 안에 응축하고 고스러지거나 씨를 품은 몸이 기꺼이 가지를 떠나 땅으로 낙하하기 좋은 계절.

평안하고 넉넉한 높은 하늘과, 냉철하고 엄숙한 바람이 마감의 시간을 일깨웠으리라. 가을은 생명연장의 끝을 시작에 연결하는 플랫폼에서, 끝은 시작이라는 진실을 전하되 엄숙한 얼굴이다. 믿음에서 비롯하는 풀어짐, 그 찰나의 순간을 이끌어내는 산파로서 가을은 실로 줄탁동기의 전범(典範)이다.

치열하게 태양을 향하던 생명들이 아래를 내려다 보게 하는, 자연의 절대성을 새삼 상면하는 오늘이다. 불변하는 무위의 질서는 결코 깨뜨려지지 않고 깨뜨릴 수 없다는 걸 몸소 감응케 하는 계절이다. 새삼 무욕과 겸허가 심연에서 일어 마음 가득 차오른다.

이렇게 어김없이 찾아 온 가을은 엄혹한 청교도적 지향이다. 지난 계절들을 충실하게 살았는지, 그리하여 가을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지를 자문하게 한다. 나는 '어제의 오늘'이라는 결실을 잘 품어 '내일'로 보낼 수 있는 도량(度量)이 될까.

증자(曾子)의 일일삼성(一日三省, 매일 세 번씩 반성하다)을 그 척도로 삼아 본다. '남을 위해서 일을 하는데 정성을 다하였는가' '벗들과의 교류에 신의를 다하였는가' '전수받은 가르침을 반복하여 익혔는가.'

가을을 닮은 증자(曾子)의 삼성(三省)

'정성'의 사전적 의미는 온갖 힘을 다하려는 참되고 성실한 마음. 중용 19장은 "정성을 기울이는 것은 사람의 길"이라고 했으니, 그런 관점에서 다른 사람의 일에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또 "정성이란 하늘의 법도"라고 했으니, 변화무쌍하면서도 매순간 변함없이 정해진 일들을 스스로 행하는 자연을 달리 가리키는 말이라 할 것이다.

정성은 스스로 있을 뿐 거기에는 어떤 개입도 없다. 정성이 있었기에 만물이 존재한다. 그래서 사람에게 정성이 없다면 자기를 잃은 것이다.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정성을 지키는 마음이 부실했기 때문이다. 만물로 하여금 정성을 다하도록 저렇듯 촘촘하게 정성을 드러내 보이는 가을 하늘 끝에 '사람의 길을 가리키는 장자의 손길'이 보인다.

우리는 무언가 간절히 바라고 정성을 기울일 때 하늘과 제일 가까워질 수 있다. 인간이 신과 가까워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다.

정성을 기울이면 매번 더 밝은 내일을 성취하며, 그러한 사람의 마음에서는 희망이 사라지는 법이 없다. 매일매일이 새로웠는가를 돌아보게 되는 가을이다.

벗들과의 교류에 신의를 다한다 함은 의리를 지킨다는 것. 서로에게 필요한 수단이 되어 함께 나아가는 관계에 한 점 의혹도 없게 한다는 것이다. 공자의 말이다. "사람에게 신의가 없으면 그 쓸모를 알 수가 없다. 만일 큰 수레에 소 멍에를 맬 데가 없고 작은 수레에 말의 멍에를 걸 데가 없으면 어떻게 끌고 갈 수 있겠는가"

'쓸모'의 척도로서 신의는 '의리에 맞는 것이라야 그 말을 실천 할 수 있다'는 바탕 위에 있다. 함께 나아가는 관계라 하여 정당성이 수반되지 않는 약속을 무조건 지키는 것은 '쓸모'가 없는 짓이며 따라서 그것은 신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의는 지극히 건강한 사회의 벼리다.

신의가 없으면 모든 사회적 관계는 불안한 상태에 떨어지고, 그 관계들 사이의 갈등과 분쟁이 일상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생장하고 생장시키며, 기대고 도우며, 더불어 영속을 꾀하는 삼라만상의 본성이 신의라는 점을, 그런 하늘이 명한 길을 혹여 벗어나지 않았는가를 증자는 매일 반성했다.

전수받은 것을 반복하여 익힌다는 것은 스스로 기쁨에 도달하는 길이다. 공자의 말이다.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정자(程子)는 이 말을 "배우는 것은 장차 그것을 행하려고 해서이니 때로 익힌다면 배운 것이 내 몸에 있게 된다. 그러므로 기뻐지는 것이다"고 풀이했다.

배움을 익혀서 무젖게 한다는 건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행위이므로, 도파민을 분출한다는 말이 아닐까 한다. 그런 이유로 배운다는 것은 본받는다는 것이고, 본받는다는 것은 앞서 깨달은 이의 기쁨을 맛본다는 것이다. 그런 기꺼움으로 앞서 깨달은 이의 하는 바를 본받으면 이내 가히 선을 밝히고 그 처음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배운바가 익숙하여 중심이 기뻐하며 그 나아감이 절로 그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해 있는지,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기쁨이 배우려는 사람에게 미칠 수 있는지를 증자는 습(習)의 거울을 통해 매번 확인하고 싶어했다. 책 읽기 좋은 이 가을에 증자의 이 같은 일일삼성(一日三省)은 가히 만권의 책이 된다.

한결같이 찾아온 이 가을은 내면에 있는 성심을 흔들어 깨우는 손이다. 생명을 지녔으며 사회를 이루고 있다면 가을이 주는 풍요를 평화의 도구로 삼을 수밖에 없다. 그 풍요는 희생과 끊임없는 도전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이 타고난 성심에서 기인한다.

그런 성심은 신(信)으로 드러나기에 증자의 삼성(三省)중에서도 신의를 곱씹게 되고, 우는 아이를 달래려고 돼지를 잡아 요리해주겠다고 한 아내의 거짓말을 참말로 바꾸기 위해 돼지를 실제로 잡았던 증자를 또 한번 생각하게 된다.

믿음을 가르침의 요체로 삼고, '믿음'에 정성을 다한 증자를 오랫만에 사심없는 상태로 상면하게 해 준 이 가을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