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 이래 부지기수의 권력 비리에 노출되면서 경화 된 의식을 나 또한 대물림 받은 것만 같아 근육이 굳는 동통에 사로잡힌다.

'법원은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초등학생처럼. '민주주의 국가를 구현하는 3권 가운데 하나가 법원이다' 그런 앎이 어떻게 내 지식체계 안에 이렇듯 명경지수처럼 뚜렷할 수가 있을까. 근래, 실존했던 사법부의 최고 수장이 직접 가리키는 곳에 대법원은 정부에 예속된 일개 부처로 입지하는데, 대한민국의 '사법부 독립'을 확신하는 오류는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가.
지난 몇 달 동안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기록들은 예사로운 사건사고처럼 연일 폭로되었다. 숨돌릴 틈도 없이 일반화되는 바람에 그 심각성을 곱씹을 겨를도 없었다. 그런 사법부의 실체는 국민적 가치관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교육을 통해 축적한 지식,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구축된 지적 기반이 사실은 거대한 음모와 거짓말들의 소산일 수 있다는 의구심에 사로잡혔다. 스스로의 확고했던 앎에 대한 의심은 극심한 혼란을 동반한다.
헌법상 사법부의 독립이나 재판·법관의 독립 보장은 그저 선언적 의미에 불과했고 결코 이루지 못할 이상(理想)이라는 뜻밖의 발견과, 그런 구조적 비정상에 눌리지 않기 위해 오히려 만연한 부조리 가운데 하나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며 상황논리를 껌처럼 씹는, 부조리와 불의에 대한 적대감도 삼켜버리는 정신승리의 물결로 온 나라 안이 잔잔하다.
사법권의 독립이 민주적 기본질서의 핵심이며  법과 정의 구현을 위해 작동한다고 믿게 한 교육의 오류를 현장학습을 통해 깨닫고 정보를 수정해야 하는 비극은, '힘있는 대상에 익숙한' 아니, '권력의 속성에 비정상이 일부 포함된다고 받아들이는 막연한 사회적 분위기'에 상쇄되며 참을만한 슬픔으로 환치되는 것이다.
양승태 사법농단 관련 사건별 관련자들 몇을 제외하곤 대한민국 국민들은 양승태의 '사법농단' 혹은 '헌법농단'에 대해 지나치리 만큼 침묵한다.
권력의 비정상을 빠르게 수긍하는 오래 된 그 혁신되지 않는 민족의 속성 앞에서, 조직적·장기적·체계적으로 사법 판결에 관여한 사법농단과 거기에 장단을 맞춘 일부 판사들에 향하는 분노보다 더한 자괴감에 뼈가 저린다. 제헌 이래 부지기수의 권력 비리에 노출되면서 경화된 의식을 나 또한 대물림 받은 것만 같아 근육이 굳는 동통에 사로잡힌다.
촛불 혁명이 낳은 정부이기에 양승태에 대한 적폐청산 차원의 단죄도 그냥 맡겨두는 것이 좋다는 태도를 달리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적폐가 양승태를 단죄하면 척결되는 것인가. 사건 관련 법관들 스스로 재판의 독립과 법관의 독립 침해를 주도하고 기획했다.
대법원장을 비롯한 법원행정처 처·차장, 기획조정실장, 각종 심의관들, 기획조정실, 사법정책실, 윤리감사관실 등의 다수의 구성원들이 일심동체가 되었다. 사법농단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제동을 거는 내부자가 아무도 없었다.
법관들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본령에서 벗어나 있는가는 양승태 대법원이 상고사건 선정 및 심리 과정에 청와대가 개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겠다고 제안한 법원행정처의 문건에서 충분이 가늠되고도 남음이 있다. 게다가 "정부 의견은 대부분 수용·반영될 것”이라고 강조한 대목은 대한민국의 길이 얼마나 암담한가를 단적으로 방증한다.
박근혜 정부의 대일정책 방향에 발맞춘 위안부 피해자 ‘손배 소송’의 무력화 시도와, 박근혜 정부의 전교조 노조자격 박탈에 부응한 법원행정처의 행동은 일선 법원 법관들의 동조없이 불가능한 것들이다. 이는 대법원이 인사권을 무기로 법원을 단일한 사상적 체계로 주조하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특히, 이른바 '부산법조비리'는 그 자체가 대법원과 일선법원의 현주소를 한마디로 설명해준다. 양승태 대법원장 직속 법원 행정처는 수년 동안 특정 피의자에게 골프와 룸살롱 접대를 받은 A부장판사의 비위사실을 검찰로부터 통보를 받았는데, 법원행정처는 해당 부장판사에 대해 정상정인 징계절차를 밟지 않았다.
A부장판사는 2011년~2015년 건설업자 B씨로부터 14차례의 골프접대를 받고, B씨가 체포되기 직전인 2015년 5월 8일 밤 B씨와 그의 변호인이 동석한 룸살롱에서 접대를 받았다. A판사는 또, B씨가 체포되기 하루 전 사무실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증거를 수집하는 과정에 동석하고, B씨 체포를 전후해 두 사람이 B씨와 수십차례 통화한 사실이 드러났다.
B씨는 조현오(58) 전 경찰청장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를 받고 있었다. 조 전 경찰청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가 발견됐다"는 허위사실 공표로 징역형을 확정 받은 바 있는 대표적인 보수성향의 인물이다.

조직적 사법·헌법 농단

A부장판사의 B씨에 대한 조력이 효과를 발휘해 법원은 검찰이 청구한 B씨의 구속영장을 거듭 기각했고, 검찰은 B씨를 조 전청장과 함께 불구속 기소하면서 A부장판사의 행위가 법관징계법·법관행동강령 등에 저촉된다고 판단해 비위사실을 법원행정처에 통보했다.
대법관인 법원행정처장은 윤리감사실에 지시해 사실관계를 파악한 뒤 당시 A판사에게 전화 '경고' 조치를 했다. 그 후 1심 재판부는 2016년 2월 두 사람의 뇌물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그런데 최근 검찰이 확보한 문건에서 현 법원행정처는 A판사의 재판개입설이 사실로 보인다고 분석하면서, '항소심이 제대로 진행된 것처럼 보여야 한다'며 재판부가 직권으로 재판을 다시 열어 1심 내용을 뒤집어야 한다고 법원에 지침을 내렸다. 
부산고법 항소심 재판부는 문건이 만들어진 시점인 2016년 9월 이미 변론을 끝냈다. 그런데 11월 직권으로 재판을 재개했고, 대법원장의 말씀에 따라 의심받지 않기 위해 두 차례 더 변론을 열었다.
결국 이듬해 2월 문건에 적힌 대로 건설업자 B씨와 조현오 전 청장의 뇌물죄 판결이 유죄로 뒤집어졌다. 문건에는 법원행정처장이 부산고등법원장에게 내용을 전달하고, 행정처 관여가 노출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라고 한 내용도 적혀 있다.
최근 검찰이 확보한 A판사 관련 문건에 따르면, 2016년 9월 법원행정처는 사건이 불거지자 A판사를 정식 조사할 경우 외부에 노출될 것을 걱정했다. 이후 향응 등과 관련한 첩보 내용을 문 판사에게 전달해 자중하도록 경고하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적었다. 심지어 문건을 작성한 주체는 법관 비위를 감독해야 할 윤리감사관실이었다.
법원행정처가 일선 법원 항소심 재판을 사실상 지휘한 정황이다. 한편 A판사는 신분상 일체의 흠결이 되지 않는 조처에 따라 1년 반이 지난 뒤 사직을 하고 얼마전 변호사로 개업했다. 법관이 직무 관련 향응을 수수했다는 의혹을 조사하는 경우, 조사 방법·결과 등에 대해 외부위원이 포함된 법원 감사위원회의 심의을 받아야 하는 원칙을 대법원이 지키지 않은 결과다.
특히, 검찰이 부산의 재판 개입 사건을 다시 살펴보려 하자, 법원은 지난 주말 압수수색영장을 기각했다. 그뿐 아니다. 법원은 지금도 ‘국가의 중대한 이익과 관련된 공무상 비밀’ 등을 들먹이면서 법원행정처 압수수색만은 절대로 안 된다고 버티고 있다.
이와 같은 사법농단의 가장 큰 폐해는, 대다수일지 소수일지 알 수는 없으나 흔들림없이 양심을 지키고 소명을 따르는 법관들에게서 자존감과 자부심 빼앗는 것이다. 법원 안에서 재판을 거래하는 정치 판사들을 발본색원하고, 헌법과 우리의 앎에 배반하지 않는 법원의 재건을 위한 개혁 담론이 절박한 지점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