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대통령 개헌안이 지난 3월 26일 발의됐다. 아랍에미리트를 순방 중인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기본권·국민주권·지방분권 강화를 뼈대로 하는 개헌안을 전자결재했다. 그러나 자유한국당과 야권 일각에서는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 자체에 반대하고 있다. 주요 쟁점 협상과정에서 여야간 충돌음만 요란하게 낼 테지만 결과는 미미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총리 선출 같은 권력구조 개편과 국민투표 시기에 대한 생각의 간극은 아예 좁혀질 것 같지 않고, 선거제도 개편·권력기관 개혁 같은 쟁점은 본질적인 면에서의 합의보다는 정치적 거래 수단으로 다뤄질 공산이 높은 국면이다. 일괄타결은 기대할 수 없고, 김빠진 부분타결이 관측되는 것이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협상이 이루어진다는 전제하에 예상해 볼 수 있는 결과다. 이번 대통령 개헌안은 국회에서 전면 배제되거나, 자유한국당의 주도하에 개헌논의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 '촛불 개헌' 의미를 상실한 채 표류할 가능성도 높다.

현행 헌법이 대통령 또는 국회의원 과반수에 의하여 발의된 개헌안은 국민투표에 붙여지기 이전에 반드시 국회에서 재적 2/3 이상의 찬성에 의한 의결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30일 현재 20대 국회의 재적 의원 수가 293명이고, 개헌안 의결에 필요한 정족수는 195명이며, 개헌안 의결 저지에 필요한 정족수는 98명인데, 자유한국당 소속 의원 수는 116명이다.

대통령 개헌안이 발의되기 직전까지 개헌 반대 입장을 고수하며 장외투쟁을 다짐했던 자유한국당이다. 돌연 국회차원의 개헌안 협상에 참여했지만, 대통령 개헌안과 별개라는 조건을 앞세웠다. 지금으로서는 방어적 유턴 이상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개헌투표에 참여하는 의원을 제적한다는 방침을 철회할 의사가 없고, 대통령 개헌안을 색깔론으로 비방·폄훼하는 태도에서 한 발짝도 물러 설 의사가 없어 보인다. '견제와 균형의 개선', '민생 개선', '법률안의 국민 발의', '주민 발안·주민 투표·주민 소환', '토지 공개념' 등 대통령 개헌안이 헌법에 삽입하겠다는 가치는 그들의 언어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국회의 개헌 협상 과정은 보수와 진보간 가치의 충돌로 점철 될 것이다. 개헌이 국민들의 미래를 여는 작업이면서, 동시에 이 나라 정치의 현주소를 확인한다는 의미를 갖는 이유다. 전개 될 개헌 양상의 방향이 국민들 삶의 양태를 결정하겠지만, 그보다 우리 정치의 체질과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개헌은 매우 엄혹한 시험대가 아닐 수 없다.

이 시험대의 지표는 물론, '우리 정치가 촛불 민심을 어떻게 읽고 있는가'이다. 여야 쌍방의 입장차를 좁히기 위한 쌍방 양보에 의한 접점을 찾는 협상이 아니라, 야권 일방이 촛불 민심에 얼마나 나가서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개헌안이 열거하는 새시대 가치들을 궤변이라고 폄훼하면서, 납득 할 수 없으니 논할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전면 부정하는 행태는 우리 정치사가 일대 변전의 기회를 맞이한 변곡점에서 오히려 퇴전케 하는 기제임이 분명하다.

특히, 여당이 자유한국당이 확보하고 있는 개헌 저지선을 무너뜨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유한국당 소속 의원들의 변절을 책동한다고 선동하는 태도 앞에서는 국민들이 망연자실 할 수 밖에 없다.

이른바 적폐청산과 선거법 위반 등의 혐의를 이용한 협박 방법을 총동원하고 있다며, 촛불 정부를 자신들과 동일시하는 관점으로 자유한국당의 개헌 저지선 와해 책동을 운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오직 정글의 법칙을 이념으로 삼는, 그리하여 개헌 작업이 가치를 협상하는 것이 아닌 숫자가 많은 쪽의 일방통행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표방한다.

숫자가 많은 쪽에는 모든 비정상이 허용된다는 빗나간 사고방식인 것이다. 박근혜와 이명박은 그들의 표상이다. 자신들의 법칙에서나 허용되는 법과 공권력의 사유화를 전제하는 눈에는 청와대와 여당의 개헌을 위한 노력이 정략적인 개헌 시도에 불과한 것으로 비칠 뿐이다.

소위 그들의 전신이 벌인 다음과 같은 악행들, 1952년의 ‘발췌개헌(拔萃改憲) 파동’, 1954년의 ‘사사오입(四捨五入)개헌 파동’, 1969년의 ‘3선개헌 파동’, 1972년의 ‘유신(維新)개헌 파동’이 촛불 정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오도하며 대통령 개헌안 저지를 당론으로 세우는 부끄러운 우리 정치의 수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개헌 저지가 그들 야권의 대오 정비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촛불 정부의 개헌 추진이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질문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자유한국당이 불퇴전의 개헌 저지 태도를 고수한다면, 개헌을 담론의 장에 내놓지 않음만 못한 결과를 초래할 공산이 높은 것이다.

큰 가치에는 시간과 비용을 비싸게 지불해도 된다

의욕이 넘치면 과욕을 부르고, 과욕은 무리를 낳게 되는 법이다. 개헌이 시대정신이라고는 하나 만약 더불어민주당이 과거 개헌 파동을 야기한 정권의 행태를 답습하게 된다면, 그러고도 개헌에 실패하게 된다면 촛불 민심의 개헌 동력을 상실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또, 민주당이 숫자에 밀려서 대통령과 권력을 분점할 총리를 국회에서 선출하고 자유한국당 소속 의원이 총리로 뽑힌다면, 촛불 정부 자체의 정체성마저 퇴색되고 말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었고, 개헌이 새 시대 로드맵의 단초이며, 지방선거와 개헌 투표 혹은 대통령 선거와 지방선거를 동시에 치름으로써 선거비용을 아끼고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 하겠다는 뚜렷한 명분은 있으나, 전략적인 후퇴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한다.

2년 뒤의 총선을 개헌 중간평가로 보고, 그때까지 개헌 담론을 이어가면서 촛불 민심을 확장한다면, 작금 자유한국당의 행태로 볼 때 수적으로도 더불어민주당이 압도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큰 가치에는 비싼 비용을 지불해도 된다.

피를 흘리지 않고 얻을 수 있다면 더욱 더 그러하다. 필요하다면 대통령 선거를 단독으로 치를 수도 있다. 조금 더 긴 호흡으로 인내하며 어렵게 여겨지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