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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호 이정표의 불편한 진실

편집국장 공인배

우리는 자신이 틀릴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과 다수의 행복에 기여할 후보 선택의 기준을 버리고, 순전히 역학적인 승리 가능성에 한 표를 던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당장 그 선택의 결과를 알 수 없고, 우리가 권한을 위임한 자들이 세운 이정표 앞에서 막막해질 따름이다.

도심 속을 걷다보면 수많은 이정표들이 높은 기둥 상부 변 사방으로 가지처럼 뻗어있다. 교차로의 모서리에 선 대형 이정표는 도로쪽으로 목을 쭉 빼고 시선을 끈다. 말하자면 이정표들은 자동차 운전자들과 보행자들 눈에 가장 잘 들어오는 공간에 서서 효과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낯익은 이정표들은 정작 그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려 할 때 갑자기 낯설어진다. 지명에서 도로명으로 표기체계가 바뀌어서가 아니라, 표기를 왜 그렇게 했는지를 모르는 탓이다. 대로와 이어지는 수많은 길들이 어떻게 번호를 부여받았는지, 그 시작점과 끝점을 알아내거나 대로와 대로 사이의 구획을 알기 까지는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알고보면 새 도로명 주소체계는 길찾기의 혁명이다. 대로가 거느린 중로와 소로, 혹은 복잡한 골목길의 어느 건물에까지 정해진 흐름만 따라가면 쉽고 빠르게 도달할 수 있는 체계다. 그러나 길을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도로의 번호를 담고 있는 이정표가 난수표로 다가온다.

한마디로 이정표는 당장 필요한 사람에게 쓸모가 없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길을 찾기 위해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겪으라고 강요한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우리는 이정표에게 합당한 지위를 주고 과분하리 만큼 비용을 지불했지만, 이정표는 거기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는 우리가 믿어야 할 방향을 가리키는 모든 것들로부터 끊임없이 배신을 당한다. 학교는 학교와 학교밖(학원) 사이를 헤매게 하고, 정부는 본분인 안정을 담보하지 못해 수시로 이는 의심과 불안에 뒤척이게 하며, 사회는 공유로 위장한 시장논리 혹은 정치놀음의 플랫폼과 본래적 영역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지난 10년의 집권정당과 정치는 또 어떤가. 패거리 권력의 연장을 위해 정부조직을 불법선거운동 본거지로 전락시켰으며, 검찰을 동원해 전 대통령을 망신주고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촛불 민심에 심판받은 정당 대표는 억지와 막말을 일삼는 등 몰상식의 기치를 높이 들어 올린다.

그들의 이정표란, 무슨 짓을 해도 그것이 개혁에 반하고 새 시대를 부정하는 것이면 '진영을 결속시킨다'로 읽혔다. 좌충우돌이 정치 밑천의 전부인 양 하다가 하루아침에 과거를 청산할 듯 자중지란을 일으키고, 진흙탕 속에서 뒹구는 걸 마다하지 않는 이유다.

경제의 중추를 담당하는 기업들은 또 어떤가. 정당한 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공정한 시장질서를 바라면서 오히려 권력에 유착되어 시장질서를 무너뜨리고 불공정을 심화시키는 이윤 극대화 추구에 정신줄을 놓았다.

개인은 이렇듯 그들의 탐욕과 배반의 틈바구니 속에서 실패하고 또 실패한다. 공정한 경쟁이라는 이정표를 따라가며, 정치·경제·사회 주체들에게 주어진 역할이 충실하게 이행될 것으로 믿었지만, 매번 스스로에게 이정표를 판독할 능력이 부재하다는 사실에 좌절하곤 한다.

무엇보다 정치 주체들은 아주 눈에 잘 띄는 곳에 이정표를 게시했지만, 그들을 찾아가고자 하는 개인은 스스로에게 난독증이 있는지를 물어보게 된다. 수차례 시행착오를 겪으며 겨우 그들이 있는 지점에 당도하면 그들은 또 사라지고없다. 덩그러니 남아있는 이정표엔 더 찾기 쉬운 혁명적이라는 그들만의 숫자와 기호가 표기되어 있다.

오늘, 개인은 왜 이렇게 참담한가. '틀림'을 혐오하는 경쟁대열 속에서 성장한 탓이다. 틀린 것이 많은 시험 결과를 불성실의 결과로 낙인찍고 탐탁해 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 오랫동안 노출됐던 탓이다. 틀리면 고립되고 낙오되는 룰에 지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틀림'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 맞음'에 집착했다. 틀리지 않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리(無理)를 지표로 삼기도 한다. 특히 정치적(선거) 선택지를 앞에 놓고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당선될 후보를 선택하려 한다.

그 결과는 종종 우리의 선택이 틀렸다고 말해주지만, 우리는 그 미래까지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다. 틀림이 없는 선택을 했으면 그 뿐, 그에 따른 결과를 놓고 굳이 선택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면서 '틀림'의 공포 속으로 스스로를 몰아넣어 고통을 자초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가 옳다'는 생각의 틀은, 틀렸을 때 느끼는 끔찍한 감정들을 배제하면서 구축되었기 때문에 갈수록 공고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틀은 잘못 선택한 자와 정치인들의 과오를 너그럽게 보는 창이 된다.

실수를 인정하는 순간이 혁신의 시작

이 틀은 나아가서 '틀림'의 공포에서 지극히 자유로운 정치인들을 양산한다. 그들은 매우 유연하다. 참담한 결과를 낳고도 '잘 해 보려고 했었다'고 말할 뿐이다. 실패한 결과를 재단하는 것을 납득하지 못한다.

탄핵되어서 재판을 받고 있는 박근혜처럼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보복을 당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궤변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는 스킬을 지니고 있다.

국정원을 동원해 대선 여론을 조작하고, 나랏돈으로 사기업을 키우고, 토목업자들에게 잉여이익을 주기 위해 환경을 파괴하면서 막대한 나랏돈을 낭비하고, 나랏돈을 지원해 여론 몰이를 할 언론사를 창간하기도 한다.

그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실패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매우 혁신적인 정치인들이 폭증하고 있는 추세다. '성공한 삶을 살기 위해선 절대로 실패해선 안 된다' 혹은 '내 성공을 절대로 의심해선 안 된다'는 옳음편 쪽에 서고 싶어하는 강박이 그들이 뿌리를 내린 토양이다.

대신 우리는 현실과 동떨어진 성공한 삶을 사는 것이고, 주체적인 것 같지만 타자화 된 채 현실의 외곽을 부유한다. 더욱 비극은, 스스로 옳다고 우기는 우리는 이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성실하며 안전하다고 느끼면서 제3자에게까지 피해를 안긴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도열한 이정표들이 무지한 상태에서 유용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기본적인 길눈이 있을 때 지표가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이정표들을 세우는 주체들에게 전권을 위임했기에 이정표는 무조건 옳고 그대로 따라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모순에 빠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당장 전도된 주객을 변환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설파한 것처럼 작용의 벼리가 되는 개인은 '나는 실수함으로 존재한다'를 이정표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틀린 것을 수정 할 때 가장 혁신적일 수 있다. 스스로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은 곧 모든 생산력과 창조력의 원천이다.

그러한 유연성으로 정치인을 비롯한 벼리에 종속되는 모든 주체들은 실수를 용서 받지 못하는 이정표를 세워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세우는 새로운 이정표를 우리는 온전히 이해해야 한다. 그걸 바탕으로 틀릴 가능성이 높더라도 최선을 선택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