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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7호 관음증과 다를 바 없는 관사증

편집국장 공인배

프로그램 제작자는 출연자들에게 흥행성을 위해 터무니없는 것들까지 포기하라고 요구하고, 카메라 앞에 발가벗은 자식들이나 스튜디오에 앉아 그걸 바라보는 부모들이나 거기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능의 새로운 형태는 자본주의 마케팅의 산물인 것이다.

애틋하고 풋풋한 20대 연예인들의 결혼생활 실험극이 안방극장 무대 위에 상연됐을 때 사람들은 열광했다. 9년 전이었다. 그 자체로 무거운 존재감을 지닌 연예인 남녀가 '우리 결혼했어요'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은 가히 문화충격이었다.

남편과 부인이라는 역할이 부여됐을 뿐 각본없는 드라마였다. 사람들은 유명 남녀가 한 집에 동거하면서 빚어내는 희로애락에 일희일비했다. 출연자들의 행동과 말은 결혼생활의 새로운 풍속이 되었고, 그들이 입는 옷이나 착용한 액세서리는 시장의 트렌드를 선도했다.

청춘 남녀는 자신만의 장기를 활용하거나 개성만점의 아이디어로 이벤트를 생산해 냈고, 시청자들은 거기에 동화 되었다. 부부는 설레기만 하는 시기를 거치고, 고착화된 습성과 다른 성격 다른 가치관 때문에 서로 충돌하는 시기를 거치고, 공존의 접점을 찾아 화평에 이르는 시기를 거치며 성숙해 가는 결혼생활을 풀어낸다.

프로그램 의도였다. 가상 결혼 생활을 통해 연애와 결혼에 관한 고민과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진솔하게 조명하고자 했다. 하지만 스타들은 스타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정겹고 열렬하고 순애보적인 요소들은 증폭되는 반면, 상호 충돌은 회를 거듭할 수록 소꿉장난 수준으로 축소되는 양상을 보였다.

출연자 스스로가 실험적인 인간형이 아닐 경우 스타들은 보편적으로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줬다. ‘우결’은 점차 스타들의 홍보 수단이 되어갔다.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만들어내는 이벤트들도 가식으로 느껴지는 즈음부터는 모든 것이 퇴색되어 갔다.

횟수가 누적되면서 이벤트 소재들도 고갈되어, 시즌이 바뀌고 출연자들이 바뀌어도 천편일률적인 내용의 연속선상에 놓이게 되었다. 프로그램의 한계이기도 했다. 함께 같은 침대를 쓰지 않는 가상의 결혼생활은 '우리 결혼했어요'의 의미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유명 연예인이 사는 일상의 단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기대와 흥분은 점차 쇠락했다. 제한된 스킨십, 의식적인 언행 같은 부자연스러움은 차라리 각본을 연출한 드라마 보다 못하다는 생각들이 채널을 돌렸다.

한동안 고민에 빠졌던 혹은 방황하던 카메라는 보다 솔직해지기로 했다. 드라마 각본의 작위성에 염증을 느끼고, 뻔한 전개와 결말에 식상한 시선을 잡아 끌 방법은 '우결'을 망친 '절제'를 내던지는 것이라는 해답을 얻은 듯 했다.

진짜 같은 가상의 관계 설정 프로그램을 뛰어넘는 지속가능한 조건은 '노골적인 엿보기'라는 결론에 이른 듯 하다. 예능 프로그램의 카메라들이 엿보기의 과몰입 상태에 빠져든 것이다. 카메라는 사람들의 실제 사생활 속을 파고들었다. 카메라의 통로는 리얼에 자극받으며 열광하는 시청자들의 호기심이다.

카메라 렌즈가 개인의 은밀한 곳을 들여다보는 구멍이 된 것이다. 구멍 안쪽에서는 각본없는 드라마가 전개된다. 남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혹은 보여지지 않는 말이나 행동거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한 개인의 습성이나 사고방식, 기호 때문에 미처 예상하지 못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비상식적인 언행이 돌발하며 시청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다. '우리 결혼했어요' 같은 역할 부여극에서는 맛볼 수 없는 쾌락이다.

훔쳐 본 노총각들의 일상을 친엄마들에게 보여주고 시청자들에게는 아들을 지켜보는 엄마들의 반응까지 세트로 비춘다. 또는 딸들의 일상을 고스란히 담은 영상이 아버지들과 시청자들에게 동시에 전해지고, 카메라는 또 딸의 동영상에 반응하는 아버지들의 리액션을 조명한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딸이 아버지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행동과 말하지 않았던 생각들, 그리고 자신이 안다고 생각했으나 아주 낯선 자식들에 경악하는 부모들 사이에서 카메라는 뿌듯한 성취감을 감추지 않는다. MC들이 그것을 대변한다.

부모들이 기겁하고 분노할 때 마다 카메라를 조정한 쪽은 자식들의 사생활 폭로가 성공적이라는 사실에 희열을 감추지 않는 것이다.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남자친구와 이벤트로 혼인신고를 하고, 각 도시의 소주 맛을 보기 위해 여행에 나서는 아들 같은 상상도 못한 일들이 구멍 안에서 벌어진다.

그것은 세대갈등을 조장하고, 부모들에게는 극심한 자괴감과 배신감을 안겨주지만 부모들은 카메라 앵글을 벗어나지 못한다. 건너편의 시청자들이 "요즘 세태가 그런데 당신만 몰랐냐"고 묻는 것 같고, "다 그러한데 당신의 아들 딸만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느냐"고 묻는 것 같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다양성의 시대에 자기 자식에 대한 부족한 이해와 무지를 참회할지언정 격노하는 무식한 꼴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 급상승하는 텐션을 억누르며 표정을 지우는 비겁한 부모들도 프로그램들의 연출 의도다.

새로운 세대를 위해 헌신하고 도태의 길을 걸어가는 부모들을 그렇게 모욕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시청자들의 힘이다. 관음증과 다를바 없는 관사증(觀私症)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방송국에 감지덕지하는 시청자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기 때문이다.

새 세대의 침공인가 천박한 욕망의 산물인가

결국, 프로그램 소비자들은 자신이 노출되지 않는 안방에 앉아서 연예인들의 욕구 충족에 충실한 돌발적 사생활을 엿보고, 그걸 바라보며 충격을 받지만 감수하려고 하는 혹은 감수할 수밖에 없는 부모들의 비루한 꼴을 함께 즐기며 쾌락을 느끼는 것이다.

카메라는 그렇게 소비자들의 천박한 엿보기 욕구를 쫓아오고 있는 것이다. 유사 프로그램들은 여러 채널에서 이미 넘쳐난다. 그리고 그보다 더한 엿보기 프로그램들은 우후죽순들 처럼 생겨날 것이다. 은밀한 것들이 거침없이 폭로될 것이다.

그렇게 사회 구성원으로서 혹은 공인으로서 억제하고 절제하던 것들이 여과없이 노출되면,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 혐오하고 경계하며 피하는 것들이 일반화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충동적 이데올로기를 고착화 시킬 공산이 높다.

그리고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이 있다. 출연자들이 프로그램의 진화를 요구하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쫓게 될 점이다. 제작자가 대본을 주진 않지만, 더 생경하고 더 자극적인 각본을 출연자가 매회 쓰고 실행하게 될 경우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상상의 일상화 혹은 가상의 현실화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삶을 왜곡할 것이다. 위험하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 은밀한 것이 없어지면 우리는 쉴 곳도 도피할 곳도 잃게 된다.

출연자들은 얼마나 더 망가지면서 전율을 안겨줄 수 있을 것인가. 머지않아 설정의 한계에 봉착 할 것이다. 개인이 개발하는 이벤트는 곧 고갈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카메라는 또 사람들의 더 내밀한 욕망 속으로 파고들 것이다.

우리들이 관사증을 치유하지 않으면 카메라가 아무 거리낌없이 우리들의 안방을 들여다보는 날을 막지 못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