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그것은 더 이상 존귀하게 여겨져서는 안 된다. 이제 국악인들은 판소리를 대중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스스로 만든 제3의 언어를 버리고, 몸과 마음에서 힘을 빼고 대중에게 다가가야 한다. 사실, 청소년들은 우리의 소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빠른 랩도 흡수하는 그들의 문화적 소양이 말해준다. 그들의 공허감을 우리의 가락이 울려 신명으로 환치시킨다면, 그 공명이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진자운동처럼 계속되며, 그 파동 속에서 대중들은 잃어버린 목청을 되찾을 것이다.

시대의 불편한 민낯, 제한적인 관계들의 집합

세상은 편리해진 만큼 삭막해졌다. 자동차며 농기계는 수레를 밀어냈고, 골목을 헐고, 품앗이를 도태시켰다. 힘들게 끌고가는 수레를 밀며 기꺼워하던 기억이나, 쩌렁쩌렁 왁자지껄 골목길을 누비며 신명나던 추억이나, 서로 노동을 거들며 나던 세월들은 어느덧 가물가물하다.

아주 끊긴 것이야 아니지만, 잔류하는 수레나 골목 그리고 품앗이는 소수 가난한 이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사라져가는 기억을 붙들고 간혹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들은 대개 백발이거나 초로에 접어든 이들이다. 그들의 그리움이란, 벽 하나에 가로막혀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세태 속에서는 자꾸만 고립무원을 자초할 따름이다.

가뜩이나 유소년기는 물론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현실보다 가상의 놀이터가 대세인 시대다. PC 모니터나 스마트폰을 통한 상호교감이 일상인 그들에게는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소통하는 것이 갈수록 거북하고 불편한 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볕 아래에서 말려 자아를 정련하고 바람 속에서 식혀 뜻을 단련하며 온몸으로 부딪치며 세파를 건너온 사람과, 방안에서 전자파를 동반한 빛과 소리에 아드레날린을 분출시키며 손가락으로 희로애락을 더듬는 사람의 언어는 서로 명백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그 지식과 시야가 우주적이라 한들, 나와 공동체 그리고 개인과 개인이 어떤 관계인지, 나와 자연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몸과 마음으로 체득하지 않고선 인간세 안에서 공동체의 가치를 발현하기 어렵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오프라인이란 대개 제한적인 관계들의 집합일 뿐이다.

필요에 의한 관계를 맺고, 필요한 만큼만 교류하고, 필요에 따라 언제든 관계를 재설정할 준비가 되어있는 그들은 효율성이나 효용가치를 중시하는 인류다. 이들이 '홍익인간'을 '나대는 인간'으로 치부하며 실소를 흘리는 건 그런 배타성의 방어적 방아쇠가 부지불식간에 당겨지기 때문이다.

어려운 일이다. 서로 돕고 정서를 교감하며 공유하는 속에서 길러졌던 인류가 새 인류와 소통하기란 결코 녹록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촌각을 다투며 변화무쌍한 시간을 좇으며 찰나라도 한눈을 팔았다간 낙오하기 십상인 불안의 시대다.

평행선을 잇는 씨줄과 날실 엮기, 태도가 관건

하지만 같은 시공간에 산다면 이들 두 인류는 같은 종이다. 홍익인간의 유전자가 다를 리 없다. 2016년 11월부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최순실 국정농단 단죄를 외치며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이 그걸 방증한다. 사실, 외롭기는 청년도 노년과 다를 바 없다. 제아무리 에너지가 넘쳐도 쉬지 않고 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잠시 멈춰섰을 때, 완전히 회복된 뒤에 다시 뛰어서는 늦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 길 위에 혼자 버려진 듯한 고립감, 얼마나 더 뛰며 버텨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 같은 것들의 엄습에 숨이 막히는 입장이란, 날개는 있으나 평행선 위를 벗어나지 못하며 타인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새와 같다.

청년의 한(恨)이나 노년의 한이나 모습은 다를지라도 질량은 다르지 않으니, 평행선을 잇는 씨줄과 날실이 희귀한 것일리도 없다. 같은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 말을 건네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소통은 '태도'의 문제다. 자기를 비우고 겸손해지면 언어의 장벽이 서로를 가로막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저변을 왜 살피는가. 세상은 빠르게 변하되 느려터진 것들, 그러나 도태되어서는 안 될 것들, 그 자체가 행복일 수 있는 문화적 소산이면서도 어느덧 존재가 가벼워진 것들, 그 스스로 화석화 되거나 세상만사 초탈하여 홀로 걸어가는 것들에 대한 성찰이다.

우리의 가락 판소리나 민요가 그 단적인 예가 아닐까 한다. 가요와 팝에 밀려났으나 제 홀로 팔자걸음을 걷는 대표적인 전문가들이 '소리꾼'일 것이다. 그들은 대체로 미디어에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어쩌다가 미디어의 창 앞에 서게 되더라도 오늘과 자신 사이의 간극을 의식하지 않는 태도로 일관한다.

그들이 자기의 언어와 행동양식을 고집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원형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서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 데서 비롯할 것이다. 이는 어떤 현상을 불렀는가. 판소리나 민요는 국악인들만의 전유물인양 되었고, 판소리가 도제식 전승으로만 명맥을 잇는 시스템을 고착화시켰다.

그것은 일반 사람들 조차도 명창이 들려주는 판소리만이 판소리라고 인식케하는 원인이 되었다. 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지정한 무형문화재(국악인)들은 각종 명목의 지원을 받아 자기 집단의 운영비를 비롯해, 이른바 국악 패거리를 양성하거나 그들의 잔치를 소수의 관객 앞에서 열어 그간 갈고닦은 것을 상연하는 것으로 소임을 다했다고 손을 턴다.

국악인이나 정부가 한 일이란, 대중에게서 소리를 빼앗은 것

국악인들이 한 일, 또는 국가나 자치단체가 국민의 혈세로 그동안 해 온 일이란 우리의 소리를 대중에게서 빼앗은 것밖에 없는 것이다. 대오각성해야 할 일이 아닌가. 우리 가락 속에는 신명이 있다. 우리의 심장과 정서는 그 가락에 어떠한 장애도 없이 합일된다.

왜 판소리는 명창과 똑같이 불러야 판소리로 인정받는가. 대중들이 최신가요를 부를 때 가수와 똑같이 불러야 노래를 부른다 하는가? 음치도 박치도 노래를 부른다. 흥이란 자기만의 음정이나 박자로도 얼마든지 발산하고 불태울 수 있다.

판소리의 설 자리가 갈수록 좁아지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국악인들이 자신들 소리의 신성성을 극대화하고 대중들의 목청을 터부시하는데서 비롯한다. 대중에게서 소리를 훔쳤으면서도, 대중들로 하여금 우리의 소리 앞에서 주눅들게하고, 대중들 위에서 거들먹거리는 그릇된 행태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더 이상 존귀하게 여겨져서는 안 된다. 이제 국악인들은 판소리를 대중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스스로 만든 제3의 언어를 버리고, 몸과 마음에서 힘을 빼고 대중에게 다가가야 한다. 사실, 청소년들은 우리의 소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빠른 랩도 흡수하는 그들의 문화적 소양이 말해준다. 그들의 공허감을 우리의 가락이 울려 신명으로 환치시킨다면, 그 공명이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진자운동처럼 계속되며, 그 파동 속에서 대중들은 잃어버린 목청을 되찾을 것이다.

그런데 대중과의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악계가 뜻밖의 낭보를 듣게 되었다. 다른 곳도 아닌 익산에서 판소리나 민요를 즐기고 싶어하는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국악인이 출현했다. 중요문화재 판소리 춘향가 제5호 이수자이자 최연소 판소리 다섯 바탕 기록을 갖고 있는 젊은 소리꾼 이다은이다.

그는 판소리&스피치 학교를 2년째 운영하고 있으며, 지난 17일 그가 이끌어 온 (사)한국판소리보존회 익산지부 사옥 내 소공연장(풍류방)에서 판소리의 흥을 익힌 대중들의 공연 '익산 판소리 풍류' 두 번째 마당을 열었다. 이날 배운 것을 선보이는 30여명의 출연자들은 하나같이 당당했다.

추임새 넘치는 소리판은 무너진 공동체의 이정표

잘하거나 서툴거나, 막힌 목이거나 터진 목이거나, 젊거나 늙거나, 이방인이거나 할 것 없이 자기 목소리를 내며 흥에 겨웠다. 표정이며 몸짓으로 그들이 뽐내는 것은 '나는 행복하다'였다. 쉰 명 남짓 되는 관객들도 그들과 혼연일체가 되었다.

이다은에게는 분명한 목표의식이 있다. '익산시민 모두 판소리 한 대목을 부르고, 세계시민 모두 소리판을 즐기며 추임새를 하며 즐길 때까지' 가 판소리&스피치 학교의 교시다. 이다은의 세대가 끝나더라도 수백 년 수천 년 전국으로 세계로 퍼져나가 소리판을 살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실에서는 그것을 위해 소리 반 공기 반의 통성에 필요한 스피치 기본 발성과 단전(복식) 호흡을 연마하고, 판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초지식과 판소리 대중화의 필요성을 익히고 발표하는 커리큘럼을 운영한다. 대중들이 잃어버렸던 언어의 기억을 되살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다은은 또, 매월 한 차례씩 풍류방에서 판소리 각 대목을 본인의 소리로 이어가는 '천일야화' 마당을 열고 있는데,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며, 이 자리에서는 누구든지 명창의 판소리 상연에 추임새로 끼어들어 한껏 흥의 물결을 유영할 수 있다.

'판소리 풍류'나 '천일야화'는 살아있으면서도 박제화되기를 거부하는 행동이라는 점에서 귀하다. 조급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느린 호흡을 되돌려 주어서 균형을 잡게하고 유연한 마음의 허리를 갖게 한다는 점에서 신통하다.

또한, 판소리와 최신가요가 과거와 현재로 구분되지 않고 둘 다 현재여야 하지만, 본래의 하나가 둘로 나뉘어 반대 방향으로 멀어지다 보니, 나뉘면서 서로 분담하게 된 결핍을 엉뚱하게도 시간에게 책임을 돌리는 형국에 이르렀다는 것을 갈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혁명이다.     

이다은이 추구하는 것은 단순하다. 바로 '추임새 넘치는 소리판'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현하려면 국악인들이 값비싼 대가 지불을 각오해야 한다.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하고, 구태의연한 지난날들을 청산하고 세상 속으로 나와서 성실하게 자기 몫을 다해야 한다.

"무의식적으로 해왔던 판소리가 지금은 운명 같다"고 말하는 이다은이 그 이정표라 할 만하다. 추임새는 그와 이 세상을 소통케 하는 언어다. 함께 나누고, 거들며 뚜벅뚜벅 주어진 시간을 걸어갈 수 있게 하는 힘이며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