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현세는 잠깐이요 미래는 영원하다.

잠깐인 현세의 환몽에 사로잡혀 미래의 영원한 행복을 잃게 되면 이보다 더 애통한 일은 없다.

만사를 다 버리고 오직 정진에만 힘쓸지어다.

혹서기 휴가를 맞았다. 집안에서 뒹굴뒹굴 하는 천국을 일찌감치 꿈꿨었다. 어딜 돌아다닌다는 것은 에너지와 비용을 수반한다. 또, 교통체증으로 몸살을 앓는 도로 위나 인파에 뒤덮인 피서지를 생각하면 숨이 막혔다. 일단 나가면 감정소모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았다.

비단 효율성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시간에 쫓기던 입장에서 주어진 시간을 내 맘대로 재단해 보는 것도 휴가의 백미가 아닐까 했다. 세상을 벗어난다는 게 공간을 옮기는 것을 뜻하거니와 일상을 등지는 걸 함께 내포하므로.

가만히 느리게 시간을 만끽하는 것이야 말로 나에게 주는 특별한 선물이라 여겼다. 그런데 막상 휴가에 돌입하자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너무 느슨해지면 일상으로 돌아가기 힘들어지진 않을까. 찰나였지만, 불볕더위 아래 내몰린 다른 이들에게 조금은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천성이 스스로를 들볶는 형인데다, 오지랖도 넓은 성격 탓에, 생각은 엉뚱하게도 일상과 나를 분리시키지 못했다. 내가 속한 세상의 행복추구가 그 일상이다 보니, 관성의 목줄은 중심이 흐트러지는 틈을 놓치지 않고 나를 잡아끌었다.

그래. 단 하루만이라도 폭염에 정면으로 맞서보자. 그렇다고 이 황금의 휴가기간에 봉사활동 같은 헌신적인 일을 내게 지우진 않겠다. 애당초 그런 생각은 없었으니까. 내키지 않는 일을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것은 위선이니까.

그렇게 나선 지리산행이다. 장수-통영간 고속도로를 타고 남하하다가 자동차를 둘 곳을 단성 쪽으로 정했다. 산청군에 속한 지리산 둘레길 코스 어느 마디의 초입으로 향하면서 주차 할 곳을 찾던 중인데 한적한 길 가에 선 이정표 하나가 눈길을 끈다.

'성철 스님 생가'였다. 끌렸다. 결코 눕지 아니하고 꼿꼿이 앉은 채로만 수행하는 장좌불와를 무려 10년 동안 해냈던 사람이다. 아니, 사람이라 부르기엔 뭔가 부족하다. 불가에서 일컫기를 그는 깨달은 이다. 속세를 떠나 고행 끝에 해탈에 이른 부처다.

윤회의 굴레, 그 얽매임에서 벗어난 존재, 속세의 속박이나 번뇌에서 벗어나 행복한 경지에 도달한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궁금해졌다. 그의 어릴 적 환경 그 무엇이 그를 성불로 이끌었을까. 그 자양은 지금도 남아있을까.

부질없는 기대일 수도 있었다. 부처는 본래 부처라고 하니까. 전생에 부처였던 살아있는 부처를 찾아 종교와 정치의 최고 지도자로 추대하는 티베트를 보더라도. 하지만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던 그의 어릴 적 흔적이 보고 싶었다.

그가 밟고 뛰어 놀던 땅과, 그가 뛰는 심장을 조율하며 쉬었을 숨들의 고향으로 가서 그가 남긴 잔향을 맡고 싶었다. 나는 자유자재한 그들의 삶을 동경할 뿐, 중력의 지배를 받는 범부이므로. 오감으로 그가 남긴 흔적을 만날 수 있다면, 유례없는 무더위쯤이야 가볍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잠시 방향을 틀어도 아깝지 않았던 시간은 성철 생가에 도착하자마자 금싸라기가 되었다. 그의 생가는 온데간데없고, 18개의 아름드리 화강암 돌기둥들이 웅장한 누각을 받치고 서 있다. 우러러보니 누각 중앙부에 현판이 걸려있다.

'겁외사(劫外寺)', 의역해 보건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이다. 누각 안쪽 성철스님의 생가터에 조성되어 있다. 마당 중앙에 시공간을 뛰어넘은 성철스님의 거대한 입상이 우뚝 서 있는데 그 위용이 마당을 꽉 채우는 듯 하고, 그 주변에는 커다란 염주와 목탁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성철스님이 출가하기 전 스물다섯 해를 살았던, 보통사람 이영주의 공간은 사라졌다. 물론, 혜고문을 지나면 복원된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기념관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완성된 성철스님을 강조할 뿐, 불완전한 이영주의 번민이나 방황은 비추지 못하고 있었다.

위화감은 절 마당 곳곳에서 스멀스멀 피어난다. 기묘하게 몸을 비틀고 있는 소나무들과 백송은 어디에서 옮겨 심어졌을까. 각 잡힌 도량을 벗어나면서 깨달았다. 이 이질감은 처음 누각을 마주한 순간부터 마음에 달라붙었다는 것을. 이 값비싼 돌기둥들은 다 뭔가.

사랑채와 기념관에 전시된 성철스님의 유품들, 특히 누더기 가사와 장삼, 고무신 같은 성철스님을 상징하는 전시물들이 이 겁외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나만 하는 것일까.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정이 되어서도 청빈낙도하던 그는 과연 겁외사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가 중생들의 불심을 깨우치기 위해 내린 법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은 겁외사를 창건한 원택스님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일까. 그가 성철스님을 20년간이나 시봉했다는 점에서 더 의아하다. 득도한 이의 눈이 범부의 눈과 다른 지점일까.

혹시 원택스님은 자신이 살 집을 이곳에 지은 것은 아닐까. 겁외사를 나서면 또 입이 딱 벌어진다. 맞은편에 선 성철스님 기념관 둘레의 우람한 돌기둥들에 압도된 탓이다. 그것은 겁외사의 돌기둥들 보다 몇 곱절 더 크다.

그곳에 성철스님은 없었다

돌기둥들은 지붕격인 화강암을 떠받치며 회랑을 이루고 있는데, 현관문 위 벽면에 배치된 청동미륵불 좌상과 현관문 좌우를 지키고 있는 금강역사상을 제외한 벽면 가득히 도자기로 구운 천불의 미륵부처상이 부조물처럼 조성되어 있다.

내부로 들어서면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세운 성철스님의 거대한 대리석상이 떡 버티고 앉아있는데 그 뒤쪽 벽면에는 연꽃 만다라 조각상을 비롯한 과거불인 연등부처와 현재불인 석가모니부처, 미래불인 미륵부처 등이 모셔져 있다.

위대한 성철 스님은 그 삼세불을 가리고 앉아 중생 앞에 나툰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좌우 벽면에는 천불상이 모셔져 있다. 무엇을 위한 기념관일까. 현관 입구 벽면에 게시되어 있는 성철스님의 참선 수행자에게 내리는 경책글이 또 무색하다.

"현세는 잠깐이요 미래는 영원하다. 잠깐인 현세의 환몽에 사로잡혀 미래의 영원한 행복을 잃게 되면 이보다 더 애통한 일은 없다. 만사를 다 버리고 오직 정진에만 힘쓸지어다. 화두를 확철히 깨치면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한 대행복을 얻느니라. 깨치지 못하고 무한히 연속되는 생사고를 받을 적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신명을 돌보지 말고 부지런히 참구하라."

소유와 집착 그리고 화려한 수식과 오만으로 가득찬 곳에 어찌 성철스님의 정신이 깃들수 있겠는가. 그것은 왜곡보다 더한 불법과 성철스님을 동시에 부정하는 행위가 아닐까 한다. 이 폭염보다 더했을 성철스님의 깨달음에 대한 열망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