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매화가 지고 벚꽃이 한바탕 장렬한 최후를 택했다. 그러나 매화의 짙은 향기는 아직 설렘으로 가슴에 남아있고, 벚꽃의 무취하며 선명한 탈속적 자태와 자취는 아름다운 한때를 마음에 각인했다. 봉오리를 틔우고 피어있기를 열흘에 불과했는데 매혹됨이 영원한 이 강렬한 인상은 그 짙은 향기와 초탈한 기개에 있는 것만은 아니리라.

일 년 내내 피는 꽃들 가운데 그 향기와 자태 못지않은 꽃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일상에 쫓기는 사람들조차 시인이 되게 하는 매화나 벚꽃은 무엇으로 사람들의 시적 영감을 자극하는가. 그것은 매화나 벚꽃이 지닌 어떤 요소보다 먼저 사람의 감성이 열렸기에 가능했으리라.

겨울의 끝에서 불쑥 다가온 '처음'이 주는 감동은, 경이로운 순간을 기대하며 '처음'을 상면하는 강렬한 감정이 맞닿았기에 배가되는 것이리다. 매화나 벚꽃으로 봄이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어떤 노래를 듣고 특정한 부분을 기억하고 그것으로 곡 전체를 연상해 내는 것처럼, 매화와 벚꽃은 시작되는 봄의 특정한 기억소자가 된 것이리라.

처음의 순간은 늘 폭발적이다. 너무나 극명하여 설명이나 다른 학습이 필요 없다. 처음의 순간은 체험 그 자체로 소통하며 공감하는 일종의 에피파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는 그것, 최초 인간의 감정지도에 각인된 처음의 희열이다.

모든 다른 존재들 속에 내재하는 '살아있으라', '느끼고 향유하라', '사랑하라', '행복하라' 그리고 모든 다른 '나'는 나와 같음을 기억하라. 그리하여 인간은 모든 존재를 아끼며 온전하게 자기 생을 발현하는 '나'를 알아보고 공감하는 시적 직관을 지녔기에, 공감하는 다른 '나'와 상면하는 순간 시간을 초월하여 빛나는 공간에 머무를 수 있다.

엘리아데는 그 신화가 우리를 최초의 시간으로 되돌려 최초의 시간을 다시 살게 만든다고 했다. 매화와 벚꽃은 다른 '나'이며 동시에 바로 '나'라는 것을 각성시키는 봄의 '처음'으로서 희열이 투사되어 되돌아오는 메아리인 것이다.

긴 겨울의 내핍과 황량함을 감내하며 열망하던 그것이며, 굳이 명상을 하지 않았지만 상면하는 순간 신화를 깨닫게 하는 기억의 현현(顯現)인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매화와 벚꽃을 통해 보았던 것은 우리의 화석화된 감각이었다. 그리하여 사라져버린 모든 처음이었다.

사실, 세상은 매순간 변화하고 있어서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방금 전의 상태와 다르다. 모든 '지금'은 '처음'인 것이다. 하지만 반복되는 일상이 우리를 무디게 만들어 급기야 우리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는 권태 속에 빠져들어 둔감해져 있었던 것이다.

매화와 벚꽃을 바라보는 우리들 인식의 저변에선 매 순간 이어지고 있는 영원한 사건의 탄생에 눈을 뜬 '나'의 순간을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대상이지만, 그것이 '처음'으로 다가왔을 때 갑자기 영원의 통찰을 경험하게 되고, 그럴 수 있는 시적 직관이 내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대체불가의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고통에 반비례하는 희열

그 감동의 실체는 처음과 교감하기 위해 두꺼운 각질을 찢고 내민 우리의 촉수다. 우리의 주체할 수 없는 희열이란 사실, 무감각의 지층을 뚫고 나오며 겪은 아픔의 총화이기도 하다. 그런 맥락에서 희열은 고통의 대가다.

'처음'을 상면하는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기에 심신의 전율에 순간 함몰되지만, 희열은 축적된 고통에 반비례한다. 희열을 주체할 수 없는 이유다.

20대 총선과 익산시장 선거에 당선되어 에피파니를 경험한 정치인들이 그 순간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인고의 나날을 이끌며 매 순간 '처음'을 상면하는 진정성 있는 리더가 되기를 바란다. 정치인이 둔감해지지 않고 '처음'의 순간들을 산다는 것은 공동체 구성원의 입장이나 상대방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다.

다른 이들 속에서 같은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정치인이라면,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처음'을 선물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