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국정원은 이제껏 우리가 보지 못했던 괴물이 되었다. 부단히 힘의 한계를 뛰어넘기를 시도했고, 새 정부의 유전자와 뒤섞이면서 결국 변이를 일으켰다.

이 괴물은 부지불식간에 국가 최고권력을 창출했기에 셀프개혁을 중얼거리곤 더이상 어쩌지 못하는 대통령의 처지가 딱할 정도다.

괴물은 무엇을 꿈꿀까. 국가권력을 조직적으로 남용하고 악용해 정권의 이익과 정파적 이해관계를 관철시켜 영원한 권력을 강취하려는 것이라면, 이미 성공한 바 있으니 확신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국정원은 이제 대통령의 정치적 치부만이 아니라 여권의 종속변수가 된 양상이다. 괴물은 민주질서를 왜곡하고 파탄내겠지만 제어수단은 없어 보인다.

국기를 뒤흔든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겠다던 국정조사는 옹호와 은폐, 호도에 명운을 건 여권과 무기력한 야권의 현주소를 재확인하고 막을 내렸다.    

지난 수십년간 국민들에게 막대한 희생과 고통을 안긴 민주화는 너무 쉽고도 빠르게 퇴행하고 있다.

'더 나은 삶'을 향한 문화적 윤리적 요청인 민주화의 의미가 이렇듯 부정되면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정치적 동력도 빠져나가고 있다.

돌아보면, 민주화 이후 국정원의 책동은 지난 MB정권 초입에서부터 노골화됐었고 집요했다.
2008년 8월 11일 국정원 김회선 국내담당 2차장이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과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 나경원 의원등과 만나 언론장악 대책을 논의했는데, 그 직후 이명박 대통령은 정연주 KBS사장을 해임했다.

이런 사실이 폭로될 시점까지 대검찰청에서 주재하는 공안 대책회의에 국정원 직원이 참석해 왔고, 국정원·법무부·행정안전부·문화관광부·경찰청 등이 참석하는 '관계기관 대책회의'가 부활했다.

민노당은 당시 김성호 국정원장을 직권남용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고, 민주당은 김회선 국정원 2차장을 국정원법 3조, 11조, 19조 위반혐으로 검찰에 고발했다.   
이같은 파동은 국정원이 여권의 기류에 편승한 결과다. 광우병 촛불정국 과정에서 여당 인사들의 "국정원이 도움이 안된다"는 불만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홍준표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국정원이 도대체 뭐하는 곳인지 모르겠다"고 공개적으로 질타하고 나섰다.
대관절 건강주권 회복을 요구하는 국민에게 국정원이 할 수 있는 일이 뭔가. 촛불을 든 국민들을 좌익 용공세력으로 몰아 고문하고 가두는 공안정국이라도 조장했어야 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평화로운 국민들을 자극해 어떻게든 긴급조치를 발동해 철권으로 통제했어야 한다는 말인가.

새누리당의 난센스는 국정원의 야욕에 불을 붙였고 걷잡을 수 없이 타올라 곧바로 과잉 양태를 보였다. BBK 고소사건을 담당한 재판부에 국정원 직원이 전화해 재판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법정에 출입했다. 담당판사는 국정원 연락관을 법정에서 질책하고, 서울중앙지법원장은 유감을 표명하는 성명서를 냈다. 

하지만 봉인이 풀린 국정원은 대선 댓글공작도 모자라 남북정상 대화록 공개까지 감행한 뒤 무풍지대에서 호가호위하고 있다.
지금 침묵하는 국정 최고책임자와 무소불위의 권능을 자랑하며 발호한 국정원의 발 밑에는 4·19 혁명, 부마사태, 5·18 광주민주화운동, 6·10 시민항쟁 같은 큰 고비와 난국들을 헤쳐온 민주화가 깔려있다.

국민들이 분노하는 이유다. 최근 국정원 사태와 관련한 잇단 시국선언은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의 표현이나 특정 정파에 대한 증오의 발동이 아니다.
여야의 판도 분할을 초월한 것이고 정파적 이해관계와 무관하다.

그러나 국회는 국정조사를 정쟁거리로 삼았다. 야당부터 망가진 민주화를 복원하라는 소명을 정략적 손익계산으로 저버렸다. 지금 민주당의 장외투쟁이 정치적 노림수 그 이상일리 없는 까닭이다.

사수해야 할 최전방의 고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고 후방으로 내려와 국민을 총알받이로 삼는 행태 아닌가. 
터무니없는 국정조사를 얼버무린 이후 패자는 국민이다. 이윤의 크기만 다를 뿐 여야는 국정감사 쇼를 통해 챙길 건 다 챙긴 승자들이다.

건강한 민주주의는 국민에게만 필요할 뿐이고, 여당은 그 반대의 길을 가고 야당은 자기 영역을 지키는 수단으로 민주주의를 외칠 따름이다.       
오늘의 민주당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정당이다. 민주당의 목소리는 민주화가 퇴행한 정도에 비례하고, 그 만큼의 정치적 지분을 획득 한다. 온전한 민주화가 이루어진다면 자연 도태 될 정당이다.

국정원사태 방관은 '체제 역주행'

대표성을 포기한 정당은 임의단체에 불과하다. 파수꾼의 외피를 쓰고 양민들 문앞에 선 이리떼다. 오늘 우리 앞의 정당이 국정원 괴물보다 위험한 까닭이다.

여야는 모두 국민과 민주주의를 담보로 땅따먹기를 하고, 국정원은 그 지형위에 서 있다.
괴물이 영속을 꿈꿀 수 있게 하는 환경이다. 권력 쟁투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패도의 정치관이 싹튼 지점이다. 초법적 권력을 쥔 국정원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어떤 희생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국정원 사태가 왜 중한가. 국기문란과 헌정파괴의 죄다. 민주주의 정치질서를 어지럽힌 주체가 국가 권력기관이다. 지키기 위해 감시와 감독의 책무를 부여받고 그 때문에 존립하는 주체가 앞장서서 어겼다. 국민생활의 현재와 미래는 불안의 늪에 빠졌다.

대통령이 체제의 반대편으로 역주행하는 국가기관을 내버려 두는 것은 손에  권력으로 체제도 바꿀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반인권적 국가기관을 옹호하는 것은 철권통치의 유신체제로 회귀하는 신호탄이다.    
 사회적 공동선에 대한 각성 없이 국정조사를 정쟁의 도구로 삼은 여야는 괴물을 키웠다. 국민을 희생양으로 삼으며 소탐대실하는 저급한 정치의 근원인 정당이기주의 앞에 국민은 통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