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우리는 지난 한 달새 미국과 한국에서 일어난 정보 대란을 격으며 두 나라간 국격이 왜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지를 체감한다. 동시에 '정보는 곧 권력'이라는 도식 아래, 정보를 악용하는 쪽과 남용하는 쪽 모두 '정보는 부도덕하다'는 인식의 틀에 갇혀있다는 것을 절감한다.  

전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인 에드워드 스노든이 미국이 전세계에서 정보 수집을 위해 도·감청 활동을 하고 특히 자국 내 38개국 외교공관들까지 대상으로 삼았다고 폭로했다.

'프리즘'(PRISM)이란 일급기밀 프로젝트를 보유한 미국 안보국과 연방수사국은 구글과 야후,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 등 인터넷 회사들의 서버에 접속해 고객들의 정보를 들여다봤다는 것이다. 지난 3월 한달간 국가안보국이 수집한 전세계 정보만 해도 970억건에 이를 정도였다.

미국의 도청, 컴퓨터 해킹, 전파 수집 등 온갖 수법이 동원된 사찰 활동은, 전통적 이념 적성국과 중동국가들이 아닌 동맹국들의 반발을 샀다. 상호 신뢰프로세스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독일 연방 검찰은 미 정보기관을 상대로 기소 준비를 하고 있으며, 독일 시민사회가 소송에 나설 가능성도 제기된다.

미국이 심혈을 기울여 온 유럽연합과의 자유무역협정 협상도 난기류에 빠졌다. 대사관과 대표부를 도청당한 유럽연합은 협상 전략이 도청에 의해 노출됐다면, 불공정한 협상 결과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미국은 국가안보를 빌미삼은 과잉 정보수집이 문제가 됐고, 테러로부터 안전을 희구하는 56%의 국민정서를 등에 업었다. 이런 특수한 지형 위에서 오바마는 전혀 사과할 뜻이 없어 보인다.

오바마는 오히려 전세계를 지배할 '프리즘'의 감시 시스템에 도취돼 있는듯 하다. 프리즘은 파놉티콘의 진화다.

건물 내부에 높이 솟은 중앙탑을 중심으로 죄수들을 수감한 독방들이 빙 둘러 배치되어 있는 원형감옥 파놉티콘. 중앙탑은 어둡고 죄수들의 방은 밝게 유지된다. 간수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죄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훤히 관찰할 수 있다.

반면, 죄수들은 중앙탑의 간수가 언제 자신을 감시하는지 모른다. 이는 죄수들이 늘 감시받고 있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게 하는 조건이며, 스스로 행동을 규율하게 하는 강력한 통제 구조다.    

미국이 보유한 '전자 파놉티콘' 감시체계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다. 피 감시자들을 한 공간에 가둬둘 필요도 없다.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 개인정보들을 언제라도 수집할 수 있다. 섬뜩한 일이다. 

우리나라 안보기관은 어떤가. 지난 대선기간에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몰래 발췌, 변조, 유출하고, 조직적인 댓글 공작으로 여당 후보를 도왔다. 국민 주권의 원리를 비웃는 신종 관건선거다.

국회가 국정원의 정치개입 사건의 진상조사를 위해 국정조사 특위를 가동하려고 하자, 위기에 빠진 국정원은 터무니없게도 국가의 기밀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남북대화 기록을 전격적으로 공개했다.

국가기밀을 누설하는 충격파로 정치개입 국면을 덮어버리겠다는 심산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줄타기였다.

남재준 국정원장은 자신의 남북 정상회담 공개 감행에 대해 "국정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불법 행위로 국정원의 명예를 지킬 수 있다는 논거가 어디에 있는지 남재준 말고 아는 사람은 대한민국 어디에도 없다.

비밀을 지켜야 할 조직이 거꾸로 비밀을 누설해 정치적 대립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 안중에는 '국가 안보'란 없고, 집권세력의 권력 유지와 조직의 이익이 존재이유라는 것을 역설할 뿐이다. 

이런 위험한 정부를 견제해야 할 국회는 지난 2일 국가기록원에 보관 돼 있는 문제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를 공식 요구했다. 법을 만드는 국회가 정략적인 편의에 따라 위법에 앞장섰다. 국가기밀을 정쟁수단으로 삼은 여야가 진실게임에 돌입한 것이다.

그러나 난마 처럼 얽힌 정국은 장기간 수습되지 못할 것이다. 정상회담 기록물 공개는 외교사에 오점을 남길 뿐, 원본을 그대로 읽는 민주당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새누리당이 교착상태에 빠져들 것이다.

낯익은 광경이다. 국회는 지리한 진실공방전에 함몰되다가 '민생은 뒷전'이라는 여론에 부딪칠 것이다. '국회 파행' 카드를 치켜든 여당 옹위세력들은 쾌재를 부를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엔엘엘 발언은 종국에 국민의 피로도를 높인 악재로 치부되어 내팽개쳐질 것이다. 

행동대장 된 남재준 국정원장

인내와 절제의 묘를 살리지 못한 민주당의 책임이 크다. 분란의 불씨가 된 남재준 국정원장은 이제 "대화록 내용은 엔엘엘 포기가 분명하다"며 정치권 논란에 직접 뛰어들어 진실게임의 주체로 나섰다. 민주당이 그 길을 터준 꼴이다. 남재준은 음지의 공무원이 아니라 양지의 정치인이 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정국을 혼란에 빠뜨린 그를 단죄하지 않고, 오히려 '국정원 자체개혁'을 주문하면서 그에게 완장을 달아준 것이 직접 계기가 됐다. 그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행동대장 역을 수행 할 것이다. 국회와 여야 정당의 대화록 공개 파장 수습 노력은 그 앞에서 물거품이 될 것이다.  

민주주의는 성숙했지만, 국회는 물론 전 국민을 상대로 야바위를 벌이는 그의 시계는 거꾸로 돌고 있다. 그 시간의 과도한 격차는 '죽기 아니면 살기' 식 작전으로 잔뼈가 굵은 그의 야성과, 미풍에 날리는 불씨에도 화르르 타오르는 민주당의 경박함 사이에서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남재준은 지난 대선 캠프에서부터 박근혜 대통령의 충견이다. 그가 자임했고, 박 대통령이 무한 신뢰의 미성으로 화답했다. 이 나라의 정점이 그릇된 것을 바로잡을 생각이 없으니 국정원 정국이 순리적으로 해결 될 가능성은 없다는 역설을 드러낸다.   

'감시사회'의 텔레스크린은 국민들을 통제하는 수단이지만, 동시에 피감시자들에게 부자유에 대한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권력의 감시가 삼엄할 수록 대중들의 권력에 대한 '역감시'가 강화되는 이유다. 그 양태나 정도는 서로 비례한다.

국내에서는 양심세력들의 시국선언이 잇따르고, 미국에서는 권력이 감시를 일상화하고 자유를 구속하며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살풍경을 그린 조지오웰의 소설 '감시사회'가 날개돋힌 듯히 팔려나가고 있다. 1984년에 발간된 책이 29년이 지난 최근 14일째 베스트셀러 100위 안에 들어갔다.
불안은 불안을 증식하며, 이성이 배제된 '파괴'의 기제가 된다. 미국이나 한국 정부는 국민들이 사회 안전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포기할 수 있는 선을 어디까지라고 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