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넉달 전 국정원의 궤변 폭탄은 일순 산소를 집어삼켜 중대한 사회적 담론의 불길을 진화하는 듯 보였다.

국정원 발 엔엘엘 관련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는, 국정원이 개입한 부정선거에 따른 대선무효 논란을 잠재우려는 시도가 명백했다.

국정원은 스스로 '국가기밀 누설죄'를 저지르며 백척간두에 섰다. 모두가 숨죽이고 납짝 업드렸다. 정권의 나팔수 언론들이 이 전무후무한 사건을 확대 재생산하고 침소봉대하는 완력을 동원해 총구를 민주당으로 돌렸다.

틀과 내용이 전혀 다른 사건이 서로 겹치며 눈사태 효과를 낼 수 있었던 원인은, 국정원의 표적이 처음부터 민주당이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건을 국기문란사건으로 규정하고, 민주주의 파괴와 헌정을 유린한 선거쿠데타에 대해 심판론을 제기한 중심축이었다. 

국정원의 총구는 민주당의 급소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무덤을 향해 불을 뿜었고, 민주당은 진위를 가릴 겨를도 없이 혼비백산 했다.

국정원의 18대 대선 부정선거 음모론을 따돌릴 출구전략은, 이명박 정권의 정치살인으로 서거한 고인에 대한 능욕이었고 그것이 주효한 것이다.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자는 아물지 않는 상처를 애써 외면하지 않고는 그 통증을 극복하기 어렵다. 더구나 인간 노무현은 민주당의 지표였다. 그 상처를 다시 찢어놓는 국정원의 광기란 치밀한 계산으로 프로그래밍된 살인기계처럼 차갑고 음습하며 무표정했다.  

그러나 국정원 주도의 지리멸렬한 지형 위에서 국군사이버 사령부의 댓글 대선개입 사건이 불거지고, 5만여건의 댓글을 단 혐의로 국정원 직원 두명이 긴급 구속되는 등 국가기관들이 조직적으로 저지른 '내란죄'가 불쑥 솟아올랐다.

국정원은 선발 출장해 배수의 진을 치고 혈전을 마다하지 않으며 자기 역할을 다한 뒤 덕아웃으로 들어간 상황이었다. 청와대는 홈에서 중간 계투에게 사인을 보냈다.

왜곡의 명수 언론들이 회전을 줘 던진 견제구가 1루에 나가 있는 윤석열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사건 특별수사팀장'의 아킬레스건을 가격했고, 윤 팀장은 더이상 걷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 앉았다.

이에 앞서 청와대와 언론의 합작에 걸린 채동욱 검찰총장은 아예 경기장에서 퇴장 당한 터였다.

세마리 토끼가 청와대의 손에 들려있다.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사건 수사의 고삐를 틀어잡은 것이 그 하나이고, 또 하나는 검찰 길들이기 성과, 그리고 국정원의 건재를 알려 이 공안정국의 질서를 유지해 나가게 된 것이다.

이미 특수통 윤석열 팀장이 물러난 자리는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공안통 이정회 수원지검 형사 1부장이 채워졌다.

청와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현직 황찬현 판사(서울중앙지방법원장)를 감사원장 후보로 지명했다. 황 법원장은 PK출신으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과 지연·학연이 있는 인물이다. 법관들이 출세를 위해 행정부와 법관의 양심 사이에서 좌고우면 하도록 줄세우는 신기원을 이 정권은 이룩했다.

그 뿐인가. 검찰총장 후보자로 김진태 전 검찰청차장이 지명됐는데, 그 역시 PK출신으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각별히 아끼는 후배로 알려져 있다.

김기춘은 누구인가. 박정희 정권에서 검사로서 유신헌법의 초안을 만들었고, "우리가 남이가,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부추겨야 해" 등 대선 승리를 위해 경상도의 결기를 다져 국민적 공분을 샀던 1992년의 이른바 '초원복집 사건의 주역'이었으며,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을 적극적으로 주도했던 인물이다.

이런 청와대 주도하에 사법부의 정치적 중립을 흔드는 '떡밥'이 뿌려지고 '완장'이 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화(寓話)다. 직설적으로 말할 때 스스로 '사실'을 의심 할 수 밖에 없는 우화다. 결코 현실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는 우화다.

더욱 섬뜩한 것은 이런 일련의 반역과 억압, 압살과 통제가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감추려 하지 않고 부당한 위력을 과시한다는 것은, 그들만의 나라에서 주권은 그들 소수에게 있다는 천명이다.

이렇게 국민이 노예에 불과하다는 자각에 사로잡히는 나라에서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4개월 만에 이 정권이 이룩한 성과를 보라. 검찰은 새누리당에 수사 기밀자료를 갖다 바치고, 새누리당은 그걸 근거로 사안을 축소하며 언론을 통해 공공연하게 수사지침을 내리고 있다.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지난달 28일 최고위원회에서 "분석 결과 검찰이 국정원 댓글 수사 공소장 변경의 증거로 제시한 5만여건의 댓글이 증거자료로써 핵심적인 정확성과 신뢰성에 치명적 오류가 밝혀졌다"며 "새 수사팀은 증거자료의 정확성을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고 검찰을 압박했다.

그런 가운데 법원은 지난달 30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혐의에 5만5천여건의 국정원 트위터 글을 추가하는 검찰의 공소장 변경을 받아들였다. 캄캄한 밤에 태풍 속에서 지켜낸 촛불처럼 귀한 순간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스핀닥터들이 법원을 어떻게 흔들지 불안감은 여전히 가시지 않는다.

이제라도 신념의 눈으로 보라

새누리당의 꼬리가 흔들리며 주위의 시선을 끈다. 꼬리에 달린 무당의 요령(언론)소리는 주변의 소리를 덮어버린다.   

그런 작태에 부화뇌동하는 검찰의 정권예속은 국민들 뇌리에 저 우화 '당나귀와 나그네'를 투사한다. 당나귀를 끌고 가던 부자가 나그네의 말을 아무런 비판 없이 따라하다가 결국 당나귀를 짊어지고 가더라는 우화.     

그것은 어쩌면 오늘의 검찰을 미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진실은, 검찰이 본래 양이었으나 호랑이 껍질을 둘러썼고 풀을 보면 좋아서 뜯어먹다가 호랑이를 보면 부들부들 떨면서 자기 껍질이 호랑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법조문과 판례를 외워 판·검사가 되는 일이라면 그것은 기계가 대신 할 수 있다. 더구나 배운대로 하지 않고 권력의 꼭두각시가 된다면 그것은 기계만도 못하다.

자기 성찰이 없고 직업관조차 없는 검사를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신념은 인간의 긍지다. 출세하지 못했지만 신념을 지킨 사람이 인생의 승자인 이유다.

물론 진부한 말이다. 하지만 신념 없는 인간에게 삶의 의미가 있을 턱이 없다. 목적달성을 위해 못할게 없는 권부라면 그만큼 법앞에 취약하다. 

검찰이 천한 유혹과 권력에 무릎을 꿇지 않기 위해 부단히 사명감을 정련하고 거기서 빛나는 빛으로 희망과 용기를 길러야 하는 까닭이다.

결국 꺾이어 넘어지는 길을 가지 않기 위해 신념의 눈으로 보라. 요란하게 흔들이는 꼬리 앞 쪽의 몸통도 따라 흔들리지 않는가. 지금와서 사법부의 판단을 기다리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말이 어떤 진정성을 담보한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