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수용하면서 보다 탄탄하고 유용한 도로를 만들어왔다. 새 도로와 확장된 도로는 또 도시의 형태를 바꾸는 동인(動因)이 된다. 우리는 그 탄탄대로 위를 자동차에 의탁해 보다 빠르게 달리며 갈수록 넘쳐나는 자동차들을 스치며 각종 신호들을 만나게 된다. 달릴 때나 설 때나 이완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도로 위에서, 소통신문은 길을 물었다.

우리가 두 발로 손수 걸을 수 있는 길들은 어디로 갔는가. 누구랄 것이 없이 비켜서야 할 만큼 좁은, 그래서 눈인사를 절로 주고받게 되는 길은 어디로 밀려났는가. 늦은 밤 돌뿌리나 괴한이 걱정돼 가족을 마중나온 사람들이 서성이는 골목은 어디에서 잊혀져가는가. 스마트폰 없이도 바람과 풀벌레 소리,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온갖 삶의 냄새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우리의 기억들은 작은 길에서 큰 길로 빠르게 빠져나갔지만, 앙금이 된 기억은 어느 길 위에도 남아 있기 마련이리라. 잊어선 안 될 기억들을 만난다면 오늘 소통신문의 막연한 외출이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리라. 길은 길 나름의 기억을 지니고 현재와 내일로 연결되며, 길은 곧 사람이니 길과 사람을 길 위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힐링이 아닐까.

'익산의 길을 따라 소통하다'는 그런 질문들의 출발점이다.

<편집자주>

일행교에서 남쪽으로 100미터쯤을 걸었다.

북서풍에 서걱거리며 불청객을 향해 손짓하는 듯한 은빛 물억새를 잠시 돌아 본다.

높푸른 하늘에 떠 있는 흰 구름 몇 점처럼 물억새는 눈부시다고 생각했다. 그 때 물억새인가 흰구름인가 두천(망동천)쪽으로 바람에 몸을 맡기듯이 떨어져 내리는 것이 있었다.

허공에서 수면 위로 미끄러져 내린 그것은 그대로 은빛 여울이 되었다.

눈은 여울 속에 한 점으로 우뚝 서 있는 피사체를 식별할 때까지 망연히 부셨다.

백로였다. 몇 번이고 잔물결의 예각에 떨어지는 한 점 햇빛이 아닌가 의심하며 더듬었다.

하지만 가을 한낮, 벗은 들판과 사람의 뜻에서 벗어난 물길 사이에서는 백(白)의 향연이 한창이었다. 순수하고 선명한 백은 모든 사물에 부딪히고 반사되며 눈을 멀게 했다. 만약에 고독한 사람이라면 여기에 홀려 오랫동안 떠나지 못할 것 같다.

고개를 우연히 들판 쪽으로 돌렸다. 이 너른 들판의 지평선 끝에는 구릉과 인가들이 자리잡고 있다.

들판을 가로지른 농로에 끌리는 이유였을 것이다. 이곳이 습지(황등호)였을 때 허리다리를 맞바라보는 저 동쪽 어디엔가는 이쪽 대처를 왕래하기 위한 나루터가 있었을 법 하다.

이곳이 습지였을 때 가장 깊었을 바닥(간척에 따라 외부에서 흙이 들어와 높아졌겠지만)을 800보 가량 뻗은 농로는 서쪽 두천과 기양천이 합류하는 지점의 제방에서 동쪽 ‘몽환신화길’사거리를 이었다.

이곳은 황등면에 속해 있다. 동쪽으로 내처 뻗어간 ‘몽환신화길’은 290보 쯤에서 도립 종자사업소 입구를 지난다.

길은 종자사업소의 남쪽 경계를 따라 동남진 하는가 싶은데 다시 400여보 쯤에서 급격하게 꺾어 서쪽으로 돌아오다가 다시 400여보 가량 되는 들판 가운데서 종적을 감춘다.

북쪽으로 뻗은 '몽환신화길'은 654미터 쯤에서 남쪽의 하나로를 연결하는 '하나로 15길'을 받아들인다.

계속 북진한 길은 황등 외화마을을 지나 2.2킬로미터 쯤에서 기양천을 건너 2.5킬로미터 지점에서 삼기면의 ‘간촌 2길’에 닿게 된다.

남쪽으로 뻗은 ‘몽환신화길’은 482여보 쯤에서 ‘몽환길’을 가지치고, 762보 쯤에서 삼성동의 ‘오동 1길’에 합류한다.

이쯤에서 ‘몽환신화길’이라는 길 이름이 궁금해진다.

몽환신화는 본래 임상동의 ‘몽환’과 월성동의 ‘신화’가 합쳐진 길 이름이다.

하지만 몽환이나 신화는 듣는 순간 떠오르는 사전적 뜻을 품은 것은 아니다.

꿈과 환상을 뜻하는 허묘한 생각을 이르는 ‘몽환’이라거나, 어떤 신격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전승적인 설화를 이르는 ‘신화’라거나 하지 않고, 지형에 따르거나 옆 마을 이름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몽환’의 경우는 황등호 동쪽에 있던 ‘몽함리’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마을은 앞뒤의 들 사이로 길게 빠진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지형이 꿴 꼬치와 같으므로 최초에는 마을 이름이 ‘뀜고지’였다가 ‘꿈꼬지’로 음운변화를 거쳐 ‘꿈을 담은 함’이라는 뜻의 ‘몽함’으로 정리되었다가 오늘날의 ‘몽환’이 되었다.

‘뀜고지’마을은 ‘몽함’으로 수정되면서 본래 의미를 잃었다. 하지만 여러개의 언덕이 줄이어 황등호 쪽으로 길게 내민 지형에 터를 붙이고 사는 사람들의 뇌리에는 ‘곶(串)’이 늘 자리잡고 있었다.

‘몽함’의 말소리를 ‘몽관’으로 듣고 ‘관’자를 ‘곶’으로 읽는 외에 ‘환’이나 ‘곤’으로도 읽어 ‘몽환’이 되었다.

이렇게 마을의 경관 일부를 표현하던 지명은 황등호가 농토로 바뀐 뒤에 마을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졌다.

지금은 어쩌면 글자 그대로의 ‘몽환(허묘한 생각)’이 마을 이름으로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이른 봄에 안개가 잦은 이곳은 몽환적인 풍경을 자랑하고, 노동과 풍요속에서 빠져드는 몽환은 망중한이 되기도 할 것이다.

‘몽환’은 ‘상상’과 가깝다는 점에서, 현실을 풍요롭게 하는 수많은 상상들이 마을 곳곳에 깃들어 있을 법도 하다.

‘신화’마을은 1935년 황등호를 논으로 간척하고 농사를 지을 사람들의 거처를 만들면서 생겨났다.

‘신화’는 기존의 ‘내화’마을 옆에 새로 생겼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새로울 신(新)자에 될 화(化)를 쓰는 이유다.

‘화’자의 유래도 몽환의 뀐고지와 유사하다. 내화마을의 본래 이름은 ‘고잔’이었다.

그 지형이 남북 들 가운데로 쭉 빠진 ‘곶’으로 되어 있고 마을이 그 ‘곶’의 안쪽에 있어 ‘곶이안’이라 하던 것이 ‘곶잔’으로 줄어 조선 중기에는 말소리 대로 꽃잔을 뜻하는 ‘화배(花盃)’로 표기되고 내ㆍ외화로 구분했는데 ‘화(花)’가 ‘화(化)’로 바뀌었다.

몽환은 임상동에, 신화는 월성동에 속해 있다. 말하자면 ‘몽환신화길’은 황등호와 임상동·월성동을 가르는데, 황등호의 동편이자 상류에 속하는 남쪽의 오동에서 북쪽의 외화마을의 ‘뱃나들이’를 지나 기양천을 건넌 뒤 삼기면에까지 이른다.

뱃나들이는 요교제(황등호) 시절 팔봉면과 황등면 사이를 나룻배로 왕래하면서 생긴 이름이다.

‘몽환신화길’의 중간 지점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동쪽 구릉지에는 전라북도 원종장(종자사업소)이 있다.

‘몽환신화길’사거리에서 원종장 쪽으로 난 길은 잘 정돈된 신작로다.

길가에 오래 산 버드나무는 마치 어떤 마을의 동구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지만 서쪽면으로 완만하게 흘러내리는 구릉의 능선 위쪽에는 원종장만이 홀로 터를 잡고 있다. 감나무를 비롯한 소나무, 향나무, 단풍나무, 포플러 나무 등이 원종장 울타리 안쪽과 바깥에 줄이어 서 있다.

그래서인지 원종장 본관은 공공기관이라기 보다는 오랜만에 찾는 고향집 같기도 하다.

원종장 본관에서 서쪽으로 원종장에 딸린 황토답들이 고즈넉하게 펼쳐져있다. 마침 서쪽 지평선 끝에 걸린 붉은 해가 황토답들의 생명력 넘치는 정취를 더해주고 있다.

글 공인배·사진 송승욱 기자

건덕정쪽에서 기양천을 건너는 다리 주변 제방의 갈대 숲

‘몽환신화길’ 사거리에서 바라본 허릿다리 쪽에서 황등호를 가로지르는 농로(몽환신화길)

전라북도 종자사업소(원종장) 전면 울타리를 이루는 나무들

몽환신화길 사거리에서 바라본 몽환신화길 남쪽방향

 몽환신화길 사거리에서 본 북쪽방향

몽환신화길 사거리에서 바라본 동쪽방향

몽환신화길 사거리에서 바라본 서쪽방향

몽환신화길 사거리에서 원종장으로 가는 길가의 버드나무

전라북도 종자사업소의 시험장(황토밭)

원종장 앞 길 북쪽방향

원종장 앞 길 남쪽방향

‘몽환신화길’ 사거리에서 원종장을 잇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