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상흔.. 낯익은 장소에서 아이들의 시각으로 풀어내

2014년 6월, 바야흐로 6·25전쟁이 일어난 지 64년이 되는 해다.

강산이 여섯 번이나 지나는 세월이 흘렀지만, 익산지역도 예외 없이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공간이 있다. 전쟁의 참혹함이 아닌, 전쟁통 한 가운데의 일상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꾸밈없이 그려내고 사투리를 통해 온전히 당시의 모습을 되살려내며 6·25전쟁에 접근하고 있는 윤흥길 작가의 ‘소라단 가는 길’. 이 소설을 통해 당시 익산지역의 면면을 들여다봤다.

참혹하고도 슬픈 역사, 6·25전쟁을 배경으로 조금은 익살스럽고도 눈물겨운 일화를 그려낸 이 이야기는 현재의 실제 소라산을 배경으로 초등학교 동창들이 모교에서 동창회를 여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졸업 40주년 홈커밍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향하는 동창생들은 마치 수건돌리기를 하듯 당시 익산지역의 추억을 하나 둘씩 꺼내어 소개하고 있다.

이야기의 배경이었던 농림핵교 방죽의 모습.

◇ 농림핵교 방죽

“우리 농림핵교 방죽은 시방도 무탈허니 잘 있는가 모르겄네.”

그 무렵 농림핵교는 거의 폐교되다시피 텅텅 비어 있었다. 한찬 총 들고 싸울만한 나이의 고등학생들이 인공 치하에서는 의용군으로 끌려가거나 숨기 아니면 멀리 피난을 떠나버리고, 수복 후에는 징집 아니면 학도병으로 국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학생 수가 형편없이 줄어든 상태였다.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로 혈서를 쓰고는 ‘멸공’이라고 적힌 머리띠를 질끈 두른 채 학도병으로 자원하기 위해 농림핵교를 출발하는 학생들의 행진 대열을 이따금 구경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반면 농림핵교 바로 이웃에 자리한 국민핵교 쪽은 사정이 영 딴판이었다. 북쪽에서 떼 지어 내려온 피난민들로 말미암아 오히려 전쟁 전보다 학생 수가 대폭 늘어나 심각한 교실 난을 겪고 있었다. 때문에 한 학년에서 한 두 학급씩 차출돼 농림핵교 빈 교실을 이용해서 수업을 해야만 했다.

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 모습.

그 앞에 자리했던 방죽은 옥황상제를 모시는 시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고 돌아간다는 것에서 유래해 ‘시녀지’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 농림핵교 방죽이 있던 자리가 현재 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 자리다. 지금은 방죽이 메워져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아직 이리농림학교의 유일한 교사가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지난 1932년에 설립된 이리농림학교는 전국 유일의 갑종(5년제) 관립 농림학교였으며, 해방 이후 이리농고와 이리농공전문대, 익산대학을 거쳐 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로 자리하고 있다.

◇ 큰남바우 철둑

익산지역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익산역 근처 정류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남바위’라는 지명.

다음 이야기는 큰남바우 일대에서 친구들 사이에서는 영웅이었지만, 인민군의 자식 ‘뿔갱이(빨갱이) 자석’이라는 오명을 쓰고 마을 어른들에게는 따돌림을 받으며 살 수 밖에 없었던 염무환의 짧은 삶을 소개한다.

옛 이리농고 모습

옛 이리농고전문대 모습

편을 갈라 싸워서 이기면 무조건 국군이고 진 쪽은 맡아놓은 인민군이 되는 것으로 심심치 않게 되풀이되는 담력싸움에서 큰남바우는 한 번도 국군 자리를 상대편 현내 마을에 내준 역사가 없다. 염무환이라는 영웅이 큰남바우를 지키고 있기 때문.

호남선 철길 근처 큰남바우 동네, 철길을 사이에 두고 전쟁놀이를 즐겨했던 아이들은 결전의 순간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언제나 흔들리지 않았던 대장 염무환을 기억하고 있었다. 염무환 대장은 멀리서 소리만 듣고도 기관차 종류를 알아맞히는 신통방통한 재주를 지니고 있었으며, 열차가 지나가기 직전 철길을 건너가던 용맹스러움을 가진 영웅이었다.

염무환 대장의 본거지였던 큰남바우의 이름은 옛날에 쓰던 털 달린 겨울용 방한모를 의미한다는 말에, 고향땅을 줄곧 지켜온 유일한 인물인 김기서 교장이 차분한 어조로 설명했다.

“그 일대가 옛적엔 익산군 북일면 밑에 남일면 땅이었지. 그러다가 읍인가 시로 승격될 때 남일면이 시내로 편입됨시나 남중동으로 개칭을 허게 되였지. 그걸로 보자면 남녘에 있는 바위를 뜻허는 지명이 틀림없을 게여.”

옛 이리역(현재 익산역)의 모습.

◇ 안압방 아자씨

전쟁통에 바보가 된 안압방 아자씨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방귀를 아흔아홉방 연달아 발사한다고 해서 안압방이라는 별명을 얻은 아자씨는 우람한 몸집의 사내였다.

아이들은 그를 가리켜 안압방 아자씨라 불러버릇했다. 때로는 성가신 존칭 따위를 떼버린 채 그냥 안압방이란 날이름으로 부르기가 예사였다. 그 자신도 상득이라는 본명이나 아자씨 따위 덤이 붙는 별명보다는 그냥 안압방으로 불리기를 더 좋아하는 눈치였다.

“어이, 안압방! 방구 한 번 뀌어봐라.”
길에서 똥장군 지게를 지고 걸어가는 안압방과 맞닥뜨릴라치면 아이들은 똑 부러진 반말지거리로 그를 가볍게 다루곤 했다.

배산 정상에서 본 일출

“이잉, 방구? 그러지 머.”
콩알만한 것들이 마냥 함부로 대하는 데도 그는 절대로 화내는 법이 없었다.
이 안압방 아자씨가 동네 아이들과 자주 어울렸던 곳이 바로 ‘배산’이다. 이야기 속에는 곰배 정씨 선산으로 등장하고 있다.

모현동에 위치한 배산은 해발 95m의 야트막한 산으로 정상에 오르면 사방이 탁 트여 남쪽으로는 익산시가지가 내려다보이고 서북쪽으로는 호남평야가 펼쳐진다. 전체가 공원으로 가꾸어져 있어 시민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이 산은 연일 정씨 문중 소유로 옥성산 또는 연주산이라고도 하며, 산에 바위가 많아 바위산으로 부르던 것이 줄어들어 현재의 이름이 됐다고 전해진다. 두 개의 봉우리로 이뤄져 있어 각각 큰 배산과 작은 배산으로 불리고 있으며 큰 배산 봉우리에는 연주정이, 작은 배산에는 배산정이 건립돼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 소라단 가는 길

지금의 남성학원이 새로 둥지를 튼 ‘소라단’의 본디 이름은 ‘송전내’였다. 이를 우리말로 풀어쓴 이름이 ‘솔밭안’이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소리 나는 대로 바뀐 이름이 바로 ‘소라단’이다.
남성학원이 옮겨오기 전 이곳에는 학생들의 소풍장소로 널리 쓰이던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었고, 그 안에 전쟁고아들이 모여 사는 보육원이 있었다.

황해도 사리원에서 남쪽으로 피난을 오다가 가족들을 잃고 고아가 된 한 소년은 하굣길에 친구와 함께 우연히 소라단 숲 속에 들어가게 됐다. 6·25때 대학살이 있었던 장소였기 때문에 무덤 속에서 원귀라도 나타날까봐 사람들이 찾지 않는 산이었지만, 소년은 숲속에 들어선 순간 환호성을 질렀다.

소라산 산책로.

“사리원 우리 고향 뒤쪽에도 요거랑 똑같은 산이 있어.”
소년은 소라단 숲 속에서 고향 사리원의 향기를 느끼며 회상한다.
소라단 가는 길, 과거 6·25전쟁 당시 대학살의 상흔을 간직하고 있어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공간.

지금의 소라산은 경사가 완만해 힘들이지 않고 올라갈 수 있어 산책로의 역할을 하며 지역주민의 도심 속 휴식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오는 2015년 완공을 목표로 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소라산 자연마당 사업이 자연생태 숲, 생태습지, 생태 탐방로, 생태체험공간을 갖춰 시민이 편안히 휴식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해 시민들이 내 집 앞마당처럼 쉽게 오갈 수 있는 친근한 쉼터가 되어줄 것으로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송승욱 기자